[어수웅 기자의 북앤수다] 가난한 右派 복거일 "그래도 난 市場을 믿는다"

좁은 골목길을 가파르게 돌아 수색 언덕배기의 아파트를 찾았다. 소설가이자 우파 자유주의 논객인 복거일(67)씨가 영어로 희곡과 소설, 그리고 경제이론서 한 편을 썼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15년 전 그의 발안으로 작지 않은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던 '영어 공용어(公用語)론'이 먼저 떠올랐음은 물론이다. 그는 거실의 앉은뱅이 책상에서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원고 교정을 보고 있었다. 아내가 결혼할 때 가져온, 30년 훌쩍 넘은 상(床)이라고 했다.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온 2001년 이래 거주해온 월세 아파트. 강남 좌파가 흔하디흔한 2013년 한국 사회에서, 우파 지식인은 강북 월세 아파트에서 재벌과 시장경제를 옹호한다? 아이러니다.

―영어로 쓴 경제 이론서 제목이 '진화하게 하라'다.

"근년에 경제학과 진화생물학 덕에 생명과 사회에 관한 지식에 혁명적 발전이 있었다. 그 발전한 지식을 자본주의와 시장 이해에 적용해 보려 했다. 개인이 자유롭게 활동해서 시장이 활발하게 움직이면, 가장 나은 것들이 발견되고 사회는 풍요를 누린다. 제목은 그런 의미다."

희곡'Unforgotten'(잊혀지지 않은 전쟁), 소설 '목성잠언록' 영역본도 곧 싱가포르에서 출간된다.

―(웃으며) 소신이었던 '영어 공용어론'의 작가적 실천인가.

"나는 사변적인 작가다. 국내 시장이 워낙 좁아, 외국 지식인을 독자로 삼아야 했다. (영어 공용어론을)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내 뒤를 이어 젊은 작가들이 영어로 작품을 써서 성공을 거둔다면 세계어인 영어에 대한 몰이해가 좀 가시리라고 본다."

15년 전만 해도 그의 주장은 민족주의 포기, 영어 모국어론으로 오독됐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화 체제 아래 한국인에게 요구되는 불가피한 생존 조건, 혹은 능동적 참여자로 독려하는 분위기. 게다가 그의 영어 집필에는 사적인 이유도 있다.

"나는 기지촌의 아들이었다. 신탄진의 미군 캠프. 열 살부터 (마흔두 살 때인) 88년까지 살았다. 6·25 때의 부역(附逆)으로 숨어다녔던 아버지는, 미군 부대에서 약방을 하며 겨우 살아남았다. 잊고 싶겠지만, 우리나라는 스스로 세운 나라가 아니다. 대한민국 토대는 미군정 3년 동안 결정됐다. 건국, 자유민주주의, 경제 발전… 미국에 절대적인 빚이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반미를 외쳐야 지식인 대접을 받는 나라.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아마 우리나라 지식인 중에서 유일한 친미주의자일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재벌 옹호나 친미는 '역사를 거스르는 보수주의자' '시장 숭배자', 심지어 '수(구)꼴(통)'이라는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통념에서 벗어난 주장을 많이 하는 지식인이 욕을 먹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욕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천박성을 드러낼 뿐이다."

복거일의 자유주의를 투박하게 요약하면, "개인들에 대한 사회적 강제를 되도록 줄여서 개인들의 자유를 보장하자는 이념"이다. 따라서 개인들의 선택을 제약하는 인위적 장애들을 줄이려 애쓰는 게 자유주의자의 본분이며, 정치나 경제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면에 적용되는 이념이라는 것.

문제는 국민 주권, 자유 투표 등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찬성하지만, 경제 분야에 대해서만은 입장이 다르다는 것이다. 부의 양극화가 극심해진 현실에서 그저 시장에만 맡겨둔다? 과반을 훌쩍 넘는 빈자의 슬픔과 분노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이때 복거일표 자유주의는 뭐라고 답변하겠나.

"현대 사회에서는 승자가 독식하는 분야가 많아진다. 그러나 복지에서는 평준화가 진행되어, 이제 중산층은 한 세기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복지를 누린다. 문제는 우리가 '부러워하는 동물'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득을 평등하게 할 방법은 없다. 공산주의에서도 이루지 못한 이상이다. 북한을 보라. 시장경제 원리를 따르는 길이 그래도 가장 낫다. 성장을 먼저 이룬 뒤, 낙오한 시민들도 최소한의 복지를 누리도록 하는 게 최선이다."

―보수의 반성이 필요한 대목은 없나.

"보수는 우리 사회 구성 원리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뜻한다. 보수가 반성할 점이라면, 대한민국 체제에서 큰 혜택을 보는 사람들 가운데 너무 많은 이들이, 특히 성공한 기업가들이, 체제를 지키는 데 전혀 관심 없는 '무임승차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대화는 좌·우익이 번갈아 서로를 죽였던 유년 시절 고향 마을의 증오, 자신의 지식을 문학이라는 형식으로 드러내겠다는 청년 시절의 선택, MB 당선 직후 캠프 참여 제안을 거절하고 가난한 지식인으로 남은 이유 등으로 자유롭게 이어졌다. 하지만 샴페인 즐기는 강남 좌파가 즐비한 세상에서, 강북 월세 아파트의 우파 지식인이 재벌과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것은 여전히 어색했다.

―아이러니 아닌가.

"나의 가난은 약간의 오기와 약간의 불운이 겹친 데서 나왔다. 약간의 오기는 글만 써서 살아보겠다고 버틴 것이고, 약간의 불운은 그동안 우리 사회의 이념적 지향이 꾸준히 왼쪽으로 이동해서 내 독자가 줄어든 거다. 가난한 내가 우리 사회 현실에서 재벌이 가장 나은 기업 형태라고 주장하는 것은 반어적 상황이지만, 케인스의 얘기대로 한 사람의 이념과 그의 재산 사이의 관계는 언뜻 보기보다 작다."

복거일의 좌우명은 "나는 알기를 열망했던 자다. 그러면 그대는?"이다.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1812~1889)의 극시(劇詩) '파라셀서스'에 나오는 구절이라 했다. 타인의 시선에 간혹 비치는 그의 '독선'과 '오만'의 희미한 근거이자, 지식인으로서 정체성을 자각하는 좌우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현상 밑에 있는 '보다 깊은 질서'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게 지식인의 자세"라며 "지식인의 가장 불행한 운명은 한번 '진리'를 만나면, 그것이 '공산당 선언'이든, '가이아 숭배'든 그 속에 안주해서 관념적 사치를 즐기는 것"이라고 했다.

역시 중요한 것은 누구나 틀릴 수 있다는 오류 가능성. 가난이 담보할지 모르는 지식인의 도덕적 정당성보다, 어쩌면 더 인상 깊었던 성찰에 대한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