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절 읽으면 장한나 떠오르고, 저 구절 읽으면 김옥길(前이화여대 총장) 선생 생각

가야금 명인 황병기(77)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2년 전부터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 '논어'의 핵심문장 100개를 간추린 종이쪽지를 넣고 다닌다. A4용지 5장에 복사한 이 쪽지를 두 번 접어 품에 간직했다가 자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꺼내든다. "하도 많이 들춰봤더니 원문을 다 욀 정도가 됐어요. 젊은이들이 스마트폰과 놀 때, 나는 '논어'와 함께 놉니다."

황 명인이 품고 다니는 '논어' 구절을 해설한 책을 냈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논어 백가락'(풀빛). 국악 대가가 읽은 '논어'는 어떻게 다를까. 황 명인은 "현대에는 맞지 않는 시대에 뒤진 말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은 빼고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보석같이 빛나는 문장만 100개를 추렸다"고 했다. '말이란 뜻이 통하면 그뿐이다'는 공자 말씀처럼, 멋부리기보다 쉽고 분명한 글쓰기가 돋보인다. 에둘러가는 법 없이 직선적인 그의 성격과 어울린다.

황 명인의 논어 풀이엔 예인(藝人)으로 살아온 그의 삶이 담겨 있다. '논어' 첫 대목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에선 첼리스트 장한나를 든다. 뉴욕에 사는 장한나가 1년에 한두 번 한국에 올 때마다 꼭 만나 예술과 음악을 주제삼아 이야기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50년 손아래이지만 함께 음악을 논할 수 있는 벗이라는 얘기다.

'발분(發憤)하면 밥 먹는 것도 잊는다'(發憤忘食)에선 10여년 전 대장암 수술을 받던 기억을 끄집어낸다. 링거병을 매단 채 병원 복도를 돌아다니다 어느 날 밤, 조명에 비친 시계탑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퇴원하자마자 아픈 몸을 잊고 단숨에 가야금 독주곡 '시계탑'을 써냈다고 했다.

'군자는 태연하나 교만하지 않고, 소인은 교만하나 태연하지 않다'(君子 泰而不驕, 小人 驕而不泰)는 구절을 새기면서 고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을 떠올린다. 수위 아저씨와 청소 아주머니에게도 자기 집에서 직접 뽑은 냉면과 빈대떡을 대접할 만큼 겸손했던 이로 기억한다. 책상머리 해석이 아니라, 삶 속에 녹아 있는 '논어'를 발견하는 기쁨이 있다.

황 명인은 "젊은 시절부터 읽었지만, '논어'의 맛을 즐기게 된 건 대학에서 정년퇴직한 이후"라면서 "'논어'에서 딱 한 문장만 고르라면, 첫 구절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를 꼽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