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값 장사? 그래, 맞다

여든둘의 디자이너는 겸손하고 솔직했다. 과오(過誤)를 담담하게 인정했고, 새 시대의 디자인 앞에 겸허했다. 현대 디자인을 대표하는 디자인 거장 중 최고령인 알레산드로 멘디니(Mendini·이탈리아)가 방한했다.

국내에선 디자인 문외한이라도 알 만한 여인 모양의 와인 병따개 '안나 G' 디자인으로 유명하지만, 1970~80년대 진보적인 디자인 담론을 이끌어온 세계 디자인계의 어른이다. 한국 기업과 가장 많이 작업한 디자이너 중 하나다. 삼성전자·LG전자·롯데카드·한샘·한국도자기 등과 함께 일했다.

국민대 동양문화디자인연구소 주최로 30일 열리는 디자인 강연회 참석차 방한한 그를 28일 만났다. 특정 브랜드 마케팅과 무관한 만남이었기에, 멘디니는 "자유로운 비판을 즐긴다"며 불편할 법한 질문에도 '뻔하지 않은' 진솔한 답을 내놓았다.

 

―한국 기업이 당신의 '이름값'으로 장사한다는 비판도 있다.

"잘 봤다. 기업들은 건축가나 디자이너의 이름으로 마케팅을 한다. 하지만 '이름값'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다. 무수한 작품으로 명성을 쌓아온 것이다. 다만 능력 있는 젊은 디자이너가 스타 디자이너에게 막혀 기회를 갖지 못하는 현실은 아쉽다."

―몇 해 전 아무 무늬 없는 김치냉장고를 사러 간 적이 있다. 매장 직원이 나더러 "촌스럽다"며 '멘디니 냉장고'를 추천했다. 그 '신상' 냉장고는 20만원이 더 비쌌다. 모양·기능은 같은데 표피만 다르다고 값을 비싸게 받더라. 지나친 상술 아닌가.

"(한참 웃다가) 기능, 형태는 같고 껍데기만 다르다고 디자인을 안 한 건 아니다. 데코레이션도 디자인의 중요한 역할이다. 에르메스 넥타이가 흰색과 검정만으로 디자인됐다면 그게 에르메스일까."(멘디니는 에르메스 넥타이도 디자인했다.)

―반세기 동안 활동하며 디자인의 진화를 체감했을 거다.

"디자인 문화를 바꿔 놓은 결정적 계기는 컴퓨터의 출현이다. 커피잔을 디자인한다 치자. 예전엔 한 가지 디자인하는 데 1시간이 걸렸다. 요즘은 30분 만에 50가지를 그린다. '창의'를 생산하는 방법이 바뀌었다."(그는 거의 컴맹이지만 '예뻐서' 맥북에어, 아이패드를 샀단다. 이메일은 볼 줄만 알고 보내지는 못한다.)

―기술 지배적 풍조에 비판적인가.

"그렇진 않다. 역설적으로 기술이 다시 '손의 힘'을 발견하기도 한다. '디자이너스 메이커스(Designers Makers)'라는 디자인 집단이 있다. 수작업하는 디자이너들이 작품을 인터넷에 올린다. 그걸 보고 사람들이 주문하면 제작한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후회하는 디자인도 있을 것 같다.

"그런 건 없다. 다만 디자인이 불필요한 것들까지 만들어냈다는 반성은 있다. 나 역시 해서는 안 될 것들을 디자인했고. 너무 권력적이거나 권위적인 것들."

―이를테면 어떤 것인가. 에르메스? 까르띠에?(멘디니는 까르띠에 설치물, 에르메스 기업홍보관을 만들기도 했다.)

"(고개를 수차례 끄덕이며) 그렇다."

―무엇이 잘못됐는가.

"즉답은 피하겠다. 다른 방식으로 답하겠다. 디자이너가 상대방이 필요한 것을 제대로 모르고 디자인하면 그때부터 재앙이 시작된다. 나 역시 사용자와는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디자인한 적이 있다. 내 비판은 이제 그만(웃음)."

―한국의 디자인에 한마디 고언(苦言)을 한다면.

"한국인들이 IT 기술 강박을 벗어나면 더 좋은 디자인이 나올 거다. 너무 많은 정보는 사람을 옭아맨다. 기술은 결국 인간을 뛰어넘지 못한다."

[손자를 아끼는 마음, 램프가 되다]

멘디니가 디자인한 제품들

 

①2010년 디자인한 조명 ‘라문 아물레또’. 손자 토마조와 태양, 달, 지구 이야기를 하다가 만든 램프. 손자의 수호물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디자인했다. 멘디니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디자인 영감을 종종 얻는다.

②올해로 탄생 20주년을 맞은 멘디니의 대표작 와인따개 ‘안나 G’. 여자친구가 기지개 켜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했다. 안나, 지금은 뭘하고 있을까. 멘디니가 답했다. “그녀는 내 여자친구였고, 이탈리아 디자이너였다. 더 이상은 노코멘트.”

③‘프루스트’ 의자.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 의자에 패턴을 입혔다. 기존 의자에 장식만을 바꿔 더 이상 새로운 디자인을 내놓기 불가능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이 작품으로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의 새 장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