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절정기는 바로 ‘지금’이다

  • 정지현 시니어조선 편집장
  • PHOTOGRAPHER 이신영(C.영상미디어)

입력 : 2013.10.30 09:49

THIS MAN | ㈜태평양자원무역 주계환 회장

철강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주계환 회장은 다루는 제품만큼이나 뚝심 있고 강건한 외모의 소유자지만 그 이면에는 섬세한 감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수동적인 삶보다는 능동적인 삶을 선택해 현재에 이른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경기도 안산의 과수원집 아들 주계환. 1960년대 그곳은 1년에 자동차가 2~3대 들어올까 말까 할 만큼 외지였다. 초등학교 졸업 후 수원의 상급학교로 진학한 그는 새벽 5시에 집을 나서 3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를 매일같이 통학했다. 눈이 많이 내린 겨울날 새벽, 길 위에 쌓인 새하얀 눈을 자신이 제일 먼저 밟고 나오던 그때의 느낌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겨울이면 사랑방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복숭아 씌우는 봉지를 만들었다. 종이가 부족해 외국에서 신문 폐지를 수입해 쓰던 시절이었다. 폐지 사이에 잡지가 끼워 올 때도 있었는데, <플레이보이> 같은 책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그렇지만 당시 나를 자극한 것은 <플레이보이>가 아니었다. 잡지에 실린 자동차, 집 등은 그야말로 문화적 충격이었다. 우리는 칫솔, 치약이 없어서 소금으로 이를 닦는데, 전동칫솔 광고가 버젓이 있는 게 아닌가. 그때부터 막연히 서양의 선진문물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을 갖게 된 것 같다.”

반세기 가까이 지난 현재, 그는 세계 각국으로 출장을 다니며 1년에 절반은 해외에 머문다. 과수나무 봉지를 만들며 동경하던 곳을 상대로 철강을 사고파는 무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 졸업 후 입사한 국내 철강회사에서 수출 업무를 담당하면서 그의 철강 인생은 시작되었다. 이후 세계 최대 광업·자원회사인 호주 BHP 빌리턴 한국지사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이건 아니다 싶었다. 편안한 일상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관리직으로 연봉도 높고 근무 조건도 좋았지만, 4년 가까이 그가 하는 업무에는 변화가 없었다. 외국계 기업의 보이지 않는 유리벽은 한국인인 그에게 새로운 일에 도전할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았던 것. 마침내 그의 나이 마흔, 과감히 사표를 내고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장사꾼은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신뢰를 파는 것

사업은 수학의 싸인 곡선처럼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게 마련이다. 직원 두 명과 함께 일본 미츠비시를 제치고 터키에 송유관 1억 불 판매를 수주할 때가 있었는가 하면 2008년 리만 사태로 철강값 하락, 거래 업체 부도, 환차손 등으로 한없이 추락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주 회장의 20년 경영 철학의 핵심은 신뢰다.

“장사꾼은 물건을 파는 게 아니라 신뢰를 파는 것이다. 만약 다음 달에 가격이 떨어질 수 있는데 사겠다고 하면, 지금 말고 다음 달에 사라고 한다. 물론 다음 달에 그들이 나에게 구매할 것이란 보장은 없다. 그렇지만 신뢰 관계를 위해서는 그들의 이익을 지켜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사지 말라고 얘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마이센 자기
화려한 문양과 세밀한 프린팅으로 장식한 마이센 접시. 해외 출장 중 구입한 마이센 자기는 주 회장이 아끼는 소장품이다.
주 회장은 출장이 잦다 보니 외국에서 주말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주말엔 업무를 보지 않으니 그 시간을 활용해 미술관, 갤러리, 앤티크 숍 등을 둘러보는 편이다. “예술에 관한 전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테크를 하고자 그림을 사는 것도 아니다. 그저 보았을 때 마음에 와닿는 것을 구입한다”고 말하는 주 회장. 그러나 그의 사무실에 있는 그림과 조각품, 앤티크 소품과 가구 등을 보면 안목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특히 관심을 갖고 구입하는 아이템 중 하나는 마이센 자기다.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마이센은 자기를 넘어 예술품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화려한 장식과 세밀한 프린팅이 압권. 애장품을 보노라니 뚝심 있고 강건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섬세한 감성이 느껴진다.

“요즘 나이가 들고 인생의 깊이를 알게 되면서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책이나 학교가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인생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는 것 같다. 초등학교는 안산에서, 중고등학교는 수원에서, 대학은 서울에서 다니다 보니 친구들의 직업이 다양하다. 초등학교 동창 중에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평생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친구도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학식이 높은 총장이나 교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업가보다 오히려 그 친구들에게 배울 점이 많다는 거다.”

문득 우리 모두는 가치의 잣대를 엄한 곳에 갖다 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래를 담보로 현재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거나, 과거의 명성에 얽매여 현재를 부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유명한 와인 평론가에게 가장 좋은 와인이 무엇인지 물으니 ‘지금 당신이 마시는 와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레이블에 집착하지 말고 그때의 분위기, 마시는 순간의 기억이 소중한 것이라는 말인데, 주 회장은 같은 맥락에서 인생의 절정기는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가 현재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도 충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주계환(60) 회장은 1993년 9월 ㈜태평양자원무역을 설립했다. 철강무역회사인 태평양자원무역은 자본금 5000만 원에 직원 두 명으로 시작했으나 현재 연매출 2300억 원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서울 본사 외에 중국, 싱가포르, 베트남, 뒤셀도르프 등에 지사를 두고 있다. 지난 10월 초에는 창사 20주년을 기념해 전 직원이 함께 일본 교토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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