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봉사활동서 내 오만을 씻어냈다

휴일 오후 한가롭던 목욕탕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20~30대의 지적 장애인 10여명이 소리를 지르면서, 물을 첨벙거리고 있었다. 바닥에 드러눕고, 넘어지고…. 그게 어떤 일인지는 겪어보지 않으면 짐작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이런 난리가 벌어지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목욕탕에 있던 5~6명의 동네 사람들에게 큰 폐를 끼친 것 같아 얼굴은 화끈거렸고, 머릿속은 하얘지는 것 같았다.

1990년대 초 어느 해 겨울 일요일. 나는 하나은행의 전신인 한국투자 금융의 사내 봉사 활동 모임인 소망회 회원들과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지적 장애인 시설인 '벧엘의 집'을 방문했다.

평소처럼 청소를 돕고 있는데 원장님이 "이분들은 보통은 여기서 목욕을 하지만, 가끔 동네 목욕탕에 데려가면 굉장히 좋아한다"면서 "한번 데려가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잠깐 망설였다. 생각해 보니 못할 것도 없겠다 싶었다. 증세가 그리 심하지 않은 분들일 테고, 회원들이 한 명씩 맡으면 될 것 같았다. 회원들과 짝을 지어 손을 잡고 목욕탕으로 가는 길, 모두 오랜만의 나들이인지 웃음꽃이 피었다.

목욕탕에 도착해 옷을 벗는 것을 도와주고 탕으로 데리고 들어서자마자 일이 벌어졌다. 오랜만에 온 목욕탕이라 그랬는지 모두 흥분 상태였다.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붙잡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얼마나 힘이 세던지 이기기가 힘들었다.

한바탕 난리가 끝난 뒤 주변을 둘러보니 그제야 동네 분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한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장애인들이 목욕탕에 와서 난리를 핀다고 버럭 화를 내거나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나도 도와주고 싶다"면서 장애인들의 등을 밀어준 분도 있었다. "나도 도와드리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면서 "대신에 목욕관리사에게 1명분 돈을 줘놨다"는 분도 있었다.

그런데 몸놀림이 자유롭지 않은 장애인 서너 명의 등을 어렵게 밀고 난 목욕관리사도 "이런 돈은 받을 수가 없다"면서 "적은 돈이겠지만, 좋은 곳에 써달라"고 했다. 눈물이 날 뻔했다.

그날 목욕탕 풍경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봉사 활동을 간다고, 나보다 못한 남을 도와준다고 조금은 뿌듯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내가 부끄러웠다. 여건이 닿지 않아서 그렇지 세상에는 표 내지 않고 언제든지 다른 사람을 도와줄 선량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1977년 대학 2학년 때 '국제시민봉사회(SCI·전 세계 40여개 국가에 지부를 운영하고 있는 봉사단체)'에 가입하면서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2011년부터는 내가 이 단체의 한국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제법 열심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봉사 활동에 참여하던 무렵 나는 참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됐다. 내가 돕는 사람들이 나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나보다 못한 사람,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는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던 내가 문제였다.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던 것이다.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진정한 친구로 대해주기를 원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목욕탕 경험을 한 뒤로 나는 '눈높이를 맞추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봉사 활동만이 아니라 직장 생활에서도 눈높이를 맞춘 대화와 협력에 힘썼다. 나보다 높은 사람을 만난다고 지나치게 굽히지 않고,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깔보지 않으려고 했다. 은행 선후배든, 직원이든 다 마찬가지였다.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은 마음을 열고 진심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또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한다는 뜻이다. 평범한 내가 은행장까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협력하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눈높이를 맞추는 법은 의외로 쉽고 간단하다. 작년 말 경기도 구리시의 '샬롬의 집'으로 은행 직원들과 봉사 활동을 간 적이 있다. 지적장애가 있는 아이들과 노인들이 사는 곳이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었는데, 사회를 맡은 직원이 "은행장님, 한 말씀 해주세요"라고 청했다. 갑자기 뻔한 인사말이 하기 싫었다. 인사말 대신 노래를 한 곡 불렀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가사를 들으면 누구나 아는 곡이다.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이란 노래다. 아이들은 어색한 율동에 맞춰, 잘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를 열심히 부르는 나를 보는 것이 재미있는지 박수를 치며 웃었다. 아이들의 웃는 모습을 보고 내친김에 한 곡 더 뽑았다. 아이들은 나와 함께 기뻐하며 즐겼다. 내가 만약 "원장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세요"라는 말이나 늘어놓았으면 아이들은 내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잘 아는 동요로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평범한 내가 어떻게 은행장이 됐을까. 만약 봉사 활동을 하면서 상대방과 진심으로 소통하는 방법, '눈높이를 맞추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아마 어려웠을 것이다.


[김종준 하나은행장은] 34년째 '하나맨'… '머리'보다 '발' 강조

김종준 하나은행장은 1980년 하나금융의 전신인 한국투자금융에 입사해 34년째 일하고 있는 정통 ‘하나맨’이다. 1956년 부산 출신으로 부산서중, 경복고를 거쳐 성균관대를 졸업했다. 졸업하는 해에 한국투자금융에 입사했다.

하나은행에서 영업1부장, PB본부장, 신탁사업본부장을 거쳐 2006년 부행장에 올랐다. 은행 영업의 두 축인 가계와 기업 담당 부행장을 모두 거쳤다.

2009년 자회사인 하나캐피탈 사장으로 옮겼다가 지난해 3월 하나은행장이 됐다. 언론의 하마평에 자주 오르내리던 후보가 아니어서 금융계에서는 ‘깜짝 인사’라는 말도 나왔지만 하나은행 내부에서는 “업무에 능하고 안정감이 있는 최적의 후보”로 꼽혔다.

학자풍의 외모와 달리 ‘머리’보다 ‘발’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취임사에서 “무슨 일이든 계획보다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하나금융에서 잔뼈가 굵은 은행인답게 존경하는 금융인은 김승유 전 하나금융 회장이라고 했다. 그는 “김 전 회장은 어떤 일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닮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