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아흔까지 후배들과 바득바득 경쟁할 독종"

좋아하는 일로 백발 되도록 '최고' 소리 듣는 게 롱런(Long Run)이다. ①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②배경 대신 실력으로 ③20년 이상 정상을 지킨 A급 현역을 추렸다. 수십년 친구와 동종업계 베테랑을 수소문해 "그 사람이 오래가는 비결 좀 귀띔해달라"고 했다. 김수현·김성근·허영만·송해에 이어 이번엔 이경규(53)다.

1991년 12월, SBS가 첫 전파를 쐈다. KBS·MBC가 비상 걸렸다. 스타 쟁탈전이 벌어졌다.

심지어 MBC '퀴즈아카데미'에도 불똥이 튀었다. 녹화 직전 PD가 "이번 회부터 아나운서 대신 이경규가 진행한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개편이라 배경 설명도 했다. "실은 이경규씨가 '교양 프로 사회 보는 게 꿈인데, 몰래카메라만 시킨다'면서 SBS로 가려고 했습니다. 꼭 잡아야 할 사람이라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이경규도 정색했다. "개그맨이라는 편견 없이 진지하게 임해 주세요."

신인 가수 이범학(당시 25세)이 그 말을 명심하고 문제지를 낭독하다 핼쑥해졌다.

"GNP는 국민총생산입니다. '새발의 피'는 무엇인가요?"

"마지막 문제는 한자입니다. …(어려운 한자를 못 읽어 4초간 침묵)."

◇10년차에 뜨다

'몰래카메라' 하면 이경규다. 1990년 송창의 PD(당시 37세·CJ E&M 방송본부장)가 처음 만들고, 이듬해 '새발의 피'부터 주철환 PD(당시 36세·jTBC 대PD)가 이어받았다.

그날 "새발의 피는 아주 적은 양을 뜻한다"고 착실하게 답변했던 서울대생(이주한·45·현직 방송제작사 대표)이 "전국민이 웃었지만 화는 안 났다"고 했다. "방송 나가고 두 달 동안 전국 여대생들한테 매주 100통씩 학보(學報)가 왔거든요."

그러나 몰래카메라 이전의 이경규를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는 1981년에 데뷔했다. 개그맨 공채시험 도입 전이다.

◇심형래가 '우뢰매' 찍을 때 그는 뭐했나

MBC 관계자가 정확한 인사 기록을 찾아 온종일 사사(社史)와 연보(年譜)를 뒤졌다. "찾았다!"는 전화가 해질녘 돼서야 왔다(1982년판 '문화방송사사' 450쪽).

"읽어 드리겠습니다. '81년 6월 개그맨콘테스트가 문화체육관에서 열렸다. 대상 최양락·인기상 이경규.' 큰 대회가 아니었나 봅니다. 우량아 대회도 입상자 이름이 다 있는데, 이건 딱 한 줄이네요."

몸으로 하는 콩트가 대세였다. 최양락·엄용수·김형곤·김보화·이상운·김정렬…. KBS·MBC 양쪽에서 쟁쟁한 동기들이 잇달아 떴다. 후배들도 앞서갔다. 한 해 늦게 데뷔한 KBS 심형래가 '우뢰매' 찍고 후지TV와 인터뷰할 때 이경규는 MBC 단역이었다.

◇롱런의 3요소

그 무렵 KBS는 쓰리랑부부·네로 25시가 줄줄이 히트했다. MBC는 죽을 쒔다. 역전 루트를 뚫은 젊은 피가 '일밤' 담당 송창의였다. "기왕의 방식으론 적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전혀 다르게 가자."

와중에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방송에 들렀다. 이경규가 보조진행자로 나왔다. 좀 듣다 몸을 곧추세웠다. '이 친구가 이렇게 웃겼어?' 정해진 대본대로 웃기는 건 남만 못한데, 순간적으로 툭툭 내뱉는 건 발군이었다.

하지만 반짝하는 사람과 롱런하는 사람이 어디에선가 갈린다. 재능의 총량이 다른 걸까? 송 PD가 "재능은 그냥 기본"이라고 했다. 재능은 뭔가가 되기 위한 요소다. 되고 나서 얼마나 오래가느냐는 다음 차원 얘기다.

"한자 중에 '솥 정(鼎)'자가 있어요. 세 발 달린 솥이란 뜻이죠. 롱런도 세 가지를 갖춰야 해요. ①자기 연료통을 계속 새로 채울 것. ②관계가 좋을 것. ③열정, 이른바 '똘끼'를 잃지 않을 것. 셋 다 있어야 솥이 서지, 하나라도 빠지면 얼마 못 가 엎어져요."

◇연료통을 채워라

그러려면 본인이 만족을 몰라야 한다. 개그맨 이윤석(41)이 "경규형은 빈둥빈둥 못 노는 사람"이라고 했다. 지방 촬영 마친 뒤 곧바로 올라와 다른 프로 녹화하고 영화사 회의 들어갔다가 치킨·맥주 시켜놓고 PD·작가 불러내 "그때 그 기획, 어떻게 됐느냐?"고 한다.

고참이 신참에게 "오래 했으니 이젠 후배들 밀어주고 싶다"고 할 때가 있다. 이경규 귀에는 "밀리니까 대는 핑계"다. "나는 끝까지 현장에서 경쟁할 거야. 선배가 정상에서 끌어줘야지 왜 밑에서 밀어주느냐?"

'전국노래자랑' 감독 이종필(33)이 보기에 이경규는 "집념이 강하고, 일관성이 없고, 추진력이 엄청난 사람"이다. 본인이 대세가 아닐 땐 대세에 묻어서라도 간다. 정한 대로 쭉 가는 대신, 쉬지 않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낸다. "배는 물 들어올 때 띄워야 간다"면서 그걸 다 실행한다.

배우 김인권(35)이 "형님은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거기서 페이소스가 생긴다. '전국노래자랑'이 개봉관에서 '아이언맨 3'와 맞붙었다. 이경규가 '아이언맨 3' 간판을 보고 "윽…" 하고 가슴을 부여잡았다. 다들 낄낄댔는데, 나중에 보니 그때 정말 관상동맥이 막힌 거였다.

◇밉지 않아야 오래간다

남들이 '나쁜 놈'이라고 이를 갈면 롱런 못 한다. 경우 바른 독종 옆에 "큰일 해 보자"는 사람이 모인다.

주철환 PD가 "이경규는 엉기지 않는다"고 했다. "본업(방송·영화)이 명확해요. 다른 건 다 부업으로만 해요. 명절에 선물 안 돌려요. 구걸·부탁 안 해요. 돌직구를 날려도 독설까지 안 가고 직설에서 멈춰요." 연예계에 가장 흔한 지뢰가 음주운전이다. 이경규는 자정 되면 일행까지 대리운전 부른다.

◇열정, 이른바 '똘끼'의 원천

부산 동성고 시절, 이경규는 3년 내내 도시락을 안 싸갔다. 점심시간 종 치자마자 책상 서랍에서 쇠젓가락을 꺼내 침 발라서 쓱 닦고, 같은 반 친구들 도시락을 뺏어 먹었다. "학우들에게 밥값 하겠노라"며 단짝과 쿵후 대련을 했다. 손주은(53) 메가스터디 대표가 "갱규 덕에 전교생이 웃고 살았다"고 했다.

이소룡 같은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나팔바지 정장에 칼구두를 받쳐 신고 서울역에 내렸다. 잘하는 일(개그)과 잘하고 싶은 일(영화)이 달라 일단 개그맨이 됐지만, 첫 영화 '복수혈전'이 망했을 때도 "영화 접겠다" 소리는 해본 적 없다. 쿵후 대련하던 단짝 최성우(53) 일맥문화재단 이사장이 "갱규의 힘은 낙천의 힘"이라고 했다.

이종필 감독이 "그 양반은 일흔·여든·아흔에 뭘 할지 머릿속에 다 있다"고 했다. 그게 영화다. 이경규가 이랬다. "종필아, 남자가 나이 들면 할 일이 없다. 그래서 도박하고 여자 만난다. 나는 영화 찍어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