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 보이(미군 부대서 잔심부름하는 소년)였던 나의 성공, 이 女人 덕분입니다"

  • 기자 김윤덕

입력 : 2013.11.03 23:29 | 수정 : 2013.11.03 23:56

[40년전 빌리 그레이엄 '여의도 집회' 통역했던 김장환 목사와 그의 아내]

美 유학 시절 만나 55년째 해로… 청소·빵 굽기 등 궂은일 맡다 보니 학교·교회 '일하는 아줌마'로 오해
"목회 중 나 싫다는 사람은 봤어도 마누라 싫다는 사람은 한명 못 봐… 올해 극동방송 新사옥 지어 기뻐"

명성으로만 들어왔던 김장환(79) 목사는 깐깐하고 성미 급한 노인이었다. "커피 만들어 금세 오겠다"던 아내 트루디(75) 여사가 재깍 나타나지 않자 "이 사람은 만날 늦어" 하며 뒷짐을 진 채 사무실을 왔다갔다했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극동방송' 신사옥 헌당을 앞두고 모처럼 부부가 함께하기로 한 인터뷰였다.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고, 트루디 김 여사가 옆에 앉자 노(老)목사의 얘기가 달라졌다. "45년 동안 한 교회(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날 싫어하는 사람은 봤어도 마누라 싫어하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어요." 트루디 여사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우리말이 서툴러서가 아니라 워낙 말수가 적은 여인이었다. '김 목사의 어떤 점이 좋아 머나먼 타국까지 따라와 입때껏 사시느냐' 묻자 이 한마디 하고 다시 웃었다. "귀엽게 생겼잖아요. 호호!"

미국 유학 시절 밥 존스 고등학교에서 만나 55년 해로한 부부에게 2013년은 뜻깊은 해다.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서울 여의도 5·16 광장에서 100만명의 인파를 불러 모은 집회를 한 지 40년 되는 해다. 한국 개신교 대부흥의 결정적 '사건'으로 평가받는 이 집회에서 당시 39세였던 김 목사는 그레이엄 목사 통역을 맡아 일약 '스타 목사'가 됐다.

지난달 17일 수원 중앙기독초등학교에서 만난 김장환 목사 내외. 아래 왼쪽 사진은 1973년 6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여의도 집회를 통역하고 있는 39세의 김장환 목사. 오른쪽 작은 사진은 초등학교에서 빵을 굽고 있는 트루디 여사.
지난달 17일 수원 중앙기독초등학교에서 만난 김장환 목사 내외. 인터뷰를 위해 앞치마 대신 스카프를 맨 트루디(오른쪽) 여사를 김장환 목사가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고 손은 이웃을 향하게 하라'가 이 노(老)부부의 한결같은 소신이다. 아래 왼쪽 사진은 1973년 6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여의도 집회를 통역하고 있는 39세의 김장환 목사. 오른쪽 작은 사진은 초등학교에서 빵을 굽고 있는 트루디 여사. 청소 등 궂은일을 도맡아 종종 '일하는 아줌마'로 오해받는다. /극동방송 제공
올해는 또 김장환 목사가 헌신과 열정을 다해 일군 '극동방송'이 서울 사옥을 새로 건립한 해다. 30년 전에 지어 스튜디오에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데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휠체어 탄 장애인들을 업어서 이동시켜야 하는 낡은 건물이었다. 경기도 어려운데 건축비는 어떻게 마련했느냐 묻자, 김 목사가 "모금"이라고 답했다. "극동방송은 모금으로 이뤄지는 복음선교기관이에요. 사람들 주머니를 열게 하는 비결요? 자신이 낸 돈이 목적대로 쓰일 것이란 믿음을 주면 되지요(웃음)." 언제고 자기 주머니를 먼저 열어 기부하는 김 목사는 "매일 저녁 공연장으로 변신할 새 사옥 마당이 홍대 앞 명소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우리 나이로 올해 80세이지만 김 목사는 바쁘다. 올해만 해외 출장을 다섯 차례 다녀왔다. 그중 두 번이 요르단과 시리아 접경 지역인 자타리였다. 김 목사의 주도로 시리아 난민 캠프에 1600채의 컨테이너형 주거 건물을 세웠다. "1월에 처음 난민촌을 봤어요. 우리의 6·25전쟁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듯한 풍경이었죠. 10만명이 넘는 난민이 유엔이 배급한 하얀 천막 속에서 살아가는데 비바람이 불면 잠도 잘 수 없었어요. 돌아와 극동방송을 통해 모금을 했죠. 처음엔 100채 정도만 지어주자 한 것인데, 방송 5시간 만에 400채 분량의 성금이 들어왔어요. 이 소식에 SK가 1000채를 기부하는 등 모두 1600채를 지어주게 된 겁니다."

트루디 여사는 컨테이너를 기증하는 두 번째 요르단 방문에 동행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헐벗은 채 맨발로 돌아다니는 모습에 가슴 아팠다"는 그녀는, "이런 일을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남편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선교사가 꿈이었던 트루디 여사는 김 목사에게 장애인 통합 교육의 중요성을 처음 일깨워준 사람이다. 담임목사로 45년 시무한 수원중앙침례교회에 유치원을 열 때 "장애아들을 함께 키워야 당신 나라가 선진국 된다"며 통합 교육을 적극 제안했다. 94년 중앙기독초등학교를 세울 때에도 정원의 10%를 장애아로 뽑게 했다. "학교에 장애아가 있어 오기 싫으면 오지 말라는 게 트루디의 확고한 원칙이었어요. 비장애아들이 장애아를 돌봐주면서 진정한 교육이 이뤄진다는 거죠." 중앙기독초등학교는 경쟁률 치열한 사립 명문이 됐다.

박정희부터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이명박까지 역대 대통령들과 각별한 친분을 쌓아온 것으로도 유명한 김장환 목사에게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 "일부에선 '정치 목사'라고도 합니다만…." 김 목사가 덤덤하게 답했다. "내 목적은 하나, 전도밖에 없었어요. 대통령을 전도하면 각료들 전도하기가 쉽잖아(웃음). 부모를 전도하면 자식들 전도하기 쉬운 것처럼요." 대형교회의 세습과 비리 등 한국 교회의 위기에 대해서도 길게 답하지 않았다. "한국 교회가 8만개라면 문제 교회는 1000개 정도예요. 묵묵히 예배 드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더 많다고 생각해요."

미군 부대에서 잔심부름하던 '하우스 보이' 출신으로 한국 교회 거목이 된 김장환 목사의 오늘은 그가 통상 '마누라'로 호칭하는 이 작은 체구의 여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지금도 중앙기독초등학교 한 귀퉁이에서 앞치마에 고무줄 바지 차림으로 빵을 굽는 트루디 여사는 그 수익금을 장애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내놓는다. 세 자녀가 외국인학교에 진학하길 원했을 때에도 "너희는 한국 아이들"이라며 고개를 저은 여인이다.

김 목사는 "시집온 뒤 한 번도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며 고마워했다. 한 가지 불만은, 너무 '큰손'이다. "1년 이상 가족들이 사용하지 않은 물건은 죄다 바자회나 재활용품으로 내놔요. 한번은 아끼던 와이셔츠가 사라져서 여기저기 찾아봤더니 교회 바자회에 나와 있습디다. 그걸 내가 만원 주고 도로 사왔다니까요?" 트루디 여사도 지지 않았다. "색깔이 야해 당신한테 어울리지도 않았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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