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 회장)는 장독대까지 확인하는 '좁쌀영감'이었죠

장롱·소반·자수·보자기….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본태박물관엔 수수한 여인의 삶이 담겨 있다. 화려하지 않은 한국 전통 공예품들은 본태(本態)라는 박물관 이름 뜻대로 '본래의 형태'에 충실하다. 전시물들은 설립자인 이행자(68) 고문이 40여년간 모은 공예품들이다. 이 고문은 고(故) 정몽우 현대알루미늄 회장 부인으로 현대가(家)의 넷째 며느리다.

지난 3일로 본태박물관이 개관 1주년을 맞았다. 그 사이 이 박물관은 제주도지사가 사무관급 이상 모든 도청 직원에게 관람하도록 지시할 만큼 제주의 상징적 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개관 1주년을 기념해 본태박물관에서 열린 제주문화관광포럼을 하루 앞두고 이행자 고문을 만났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며느리이자 노현정 전 아나운서의 시어머니로서의 자신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부담스러운지 어렵게 입을 뗐다. "TV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사치스럽고 화려한 재벌가 여인의 삶이요? 그건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현대가 며느리로 산 40년 인생 스토리가 그의 공예품을 닮았다.

요즘 말로 숙명여대 '퀸카'였던 이행자 고문과 동갑내기 재벌 2세 정몽우 회장의 연애결혼은 충분히 로맨틱하다. 시집살이 얘기를 빼면 그렇다. "결혼 후 15년 동안 사실상 시부모님 모시고 살았어요. 시아버지(고 정주영 회장)는 오전 5시에 아침을 드셨어요. 아침상 차리려면 전 3시에 일어나야 했죠."

시부모님은 사치를 몰랐다. "시아버지께 검약을 배웠어요. 시아버지는 장독대까지 열어보시는 '좁쌀영감'이셨죠. 작은 살림 하나 허투루 낭비하지 못하게 하셨어요. 시어머니(변중석 여사·2007년 작고)는 평생 미용실 한 번 안 가셨던 분이에요. 돈을 세보지 않고 꺼내 들 때는 동대문시장에 장 보시다 어려운 이웃을 만났을 때뿐이셨죠."

1년에 열 차례가 넘는 제사도 직접 준비해야 했다. 식재료 장만하고 음식 준비하는 일 모두 며느리들의 몫이었다. "지금은 위로 두 분 형님 돌아가시고, 셋째 형님은 저보다 어리다 보니 주로 제가 제사상 차림을 주관하죠. 그런데도 제사가 다가오면 불안해서 다른 일을 못해요."

이 고문이 전통 공예품에 관심을 가진 것은 결혼 직후부터다. 처음에는 집을 예쁘게 꾸밀 생각으로 공예품을 수집했다고 한다. 그가 마흔다섯일 때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1990년). 남편 없이 세 아들을 키워야 하는 여인의 마음이 가벼울 리 없었다.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줄, '가치'를 배울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했어요. 그게 전통 공예품이었죠. 돈을 벌고 싶었다면 도자기나 유명 작가의 그림을 사면 되죠."

작은 소반과 자수, 선비들이 쓰던 벼루와 연적에는 아들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이 담겼다. 수집품이 점점 늘어 집을 가득 채웠다. 박물관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우리 전통의 가치를 알리고 싶었다. "그때 '왕자의 난'이 일어났어요. 아들들의 경영권 다툼이었죠. 남편이 없는 저는 배제됐고요. 박물관 건립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죠."

2008년 이 고문은 다시 박물관 건립을 준비한다. "친분 깊은 홍라희 리움미술관장도 절 말리더군요. '박물관은 희생하는 마음으로 해야지 고생을 엄청 한다'는 거죠. 손아래 동서 김영명 여사(정몽준 의원 부인)가 물심양면 도와줘서 가능했어요. (정)몽준 의원이 일찍 혼자된 형수를 보살펴 준 거죠."

개관 후 이 고문은 매주 제주에 내려가 박물관을 직접 관리한다. 현재 박물관장은 미술사를 전공한 둘째 며느리 김선희씨가 맡고 있다. 셋째 며느리 노현정씨도 틈나는 대로 제주에 와 시어머니의 일을 돕는다고 한다. "인기 아나운서 출신이다 보니 '불화설' '파경설' 등 근거 없는 오보(誤報)로 마음고생을 할 때가 많아요. 행복하게 잘살고 있습니다."

박물관은 그가 40여년간 수집한 공예품(1박물관)에 살바도르 달리, 이브 클라인, 백남준 등 현대 작가들의 작품(2박물관)이 더해졌다. 박물관 설계는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맡았다. 이 고문은 그가 명성을 얻기 훨씬 전인 20여년 전부터 그와 친분을 유지해왔다. 박물관에는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고려하는 건축가 안도의 건축 철학이 그대로 배어 있다. 안도의 작품도 제주도 개발 붐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현재 박물관 바로 앞에 SK 한 계열사의 콘도가 들어설 예정이다. "콘도가 들어선다고 하자 안도가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는 설계를 직접 해주겠다고 나섰는데도 거절하더군요. 안타깝습니다."

요즘 그는 자기 얼굴을 알아보고 말을 걸어오는 주민들이 있다며 즐거워했다. "제주도에 가치 있는 박물관을 지어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힘이 나요. 제가 건립했지만 박물관은 이제 주민들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