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조선 에세이] 가을 短想(단상)

아파트 현관문 밖은 이미 가을 깊숙이 들어와 머물고 있다. 현관문을 소리 안 나게 닫았는데도 '뎅그렁 뎅그렁' 현관문에 매달려 있던 풍경 소리가 길게 따라온다. 그 풍경소리에 가을 색이 짙게 배어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산책길로 들어서자 그동안 보지 못했던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다. 봄이나 여름보다야 화려하진 않지만, 깊이가 있는 색감으로 가을바람에 하늘거린다.

계단 틈새를 어찌어찌 비집고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매단 강아지풀이 그렇고 개울 노릇도 못하는 개울가에 자리 잡은 갈대 서너 송이가 활짝 피어 도심에 가을 냄새를 짙게 풍기니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하며 노래가 절로 흘러나온다.

그렇다. 가을엔 편지를 쓰고 싶다. 이름을 몰라도 그만이고 어디 사는지 몰라도 그만다. 그냥 내 편지를 받아 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 뿐이다. 따져보면 특별히 외로워할 일이 없는데도 누군가에게 털어 놓아야 할 얘기들이 쌓여있고 그 쌓인 높이만큼 누군가가 쓸쓸하고 그립다.

곱던 단풍잎들이 마른 잎 새로 땅 위로 내려와 어디로 갈지 몰라 바람 따라 이리저리 뒹구는 모습은 왜 그리 슬픈지.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찬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왜 그리 쓸쓸함을 더 하는지.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가 생각나고 구르몽의 '낙엽'이 들려오고 장사익의 '댄서의 순정' 같은 노래가 내 가슴을 뒤흔드는 것도 바로 이때가 아닌가 싶다.

그러길래 긴 여름내 텅 비어있던 쪽지방에 갈 곳 잃은 단풍잎이 하나둘 쌓여 간다. 색깔들은 다 제각각이나 한 가지 공통점은 외롭고 쓸쓸함을 지닌다. 왜들 이렇게 외로움에 목이 마른 건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쓸쓸함도 커져가나 보다. 키만큼 자란 쓸쓸함을 견디다 못해 빠져나와 ‘차 한잔 하자’, '친구 하자' 한다.

쓸쓸한 가을날이면 팽팽한 햇살이 내려앉아 노니는 전망 좋은 카페에 앉아 차 한 잔에 가을을 우려내어 마셔 보는 것도 좋겠다. 용문산 산자락도 좋고 문경새재도 좋고 아니면 내 집 거실에 앉아 곱게 말려 놓은 노오란 감국(甘菊)차 한 잔이면 가을이 내게 온 게 아니고 내가 가을을 품은 게 아니겠는가. 지나가던 단풍잎들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정담을 나누다 보면 쓸쓸함을 잊고 용기백배 다시 떠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