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에게 핸드백은 자신을 드러내는 작은 박물관

"너 그러다 불알 떨어진다!"

연세대 독문과를 졸업한 아들이 여자 핸드백 만드는 회사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부친은 이렇게 한탄했다. '황해수산'을 세우고 키운 부친이 보기에 핸드백 회사는 전도유망한 패션업체가 아니라 내리막길을 걷는 봉제 공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도 처음부터 핸드백으로 먹고살려던 건 아니었다. "형들은 대학 졸업 후 아버지 자회사에서 사장을 하고 있었어요. 오너 아들이라고 아버지 회사 임원으로 가는 게 이해가 안 갔죠. 딱 3년만 아버지의 온실 말고 딴 데서 사회생활을 배워보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그래서 입사한 데가 해외 수출업체 '청산'이었고, 만드는 아이템이 핸드백이었다.

'딱 3년만'이 '33년간'이 될 줄 그땐 몰랐다. 1979년 12월 입사해 이듬해 3월 이탈리아로 출장을 갔다. 공장에서 만난 현지인들이 그에게 하소연했다. 핸드백 시장은 나날이 크고 있는데 자기네 공장 장인(匠人)들이 45세 이하로는 아무도 없어 곧 문을 닫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당시만 해도 아시아에는 해외 유명 디자이너의 고급 상품을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제조하는 업체가 없었다. 손수 회사를 차리면 이탈리아 명품 회사에서 원자재를 받아 가공한 뒤 다시 수출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1987년 직원 15명으로 자신의 회사를 열었다. 핸드백 제조업체 '시몬느'의 박은관(58) 회장 얘기다.

박은관 회장은 "친구들은 대기업 들어가서 건설업·전자·금융·조선 쪽을 다루는데 나는 봉제…. 근데 재미있었다"고 했다. "건설 회사 다니는 놈이 갖고 있는 캔버스가 100호짜리 대작(大作)이면 핸드백은 10~20호짜리 소품(小品)이죠. 하지만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맘껏 그릴 수 있었어요."

미국 뉴욕으로 날아간 그는 당시 최고의 인기 브랜드였던 DKNY의 가방 7개를 사서 이탈리아산 최고급 가죽과 부자재로 똑같은 가방을 만들어 DKNY 본사를 찾아갔다. 구매 담당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품질은 같은데 공급가는 40%나 싸서였다. 하지만 담당자는 "고객이 '메이드 인 코리아'인 걸 알면 안 살 것 같다"며 계약을 주저했다. 박 회장은 "시험 삼아 사봐라. 전 세계가 한국의 손맛에 놀랄 것"이라고 장담하며 2만달러어치 주문을 따냈다. 핸드백은 뉴욕 고급 백화점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DKNY는 이듬해 물량의 60%를 시몬느에 맡겼다. 그 후 시몬느는 단순 하도급 수준인 OEM에서 벗어나 직접 디자인해 제품을 만드는 ODM(제조자개발생산) 방식으로 핸드백을 생산하며 미국 시장 30%, 세계시장 8%를 점유하는 1위 업체로 자리를 잡았다. 마이클 코어스, 마크 제이콥스, 지방시, 버버리, 로에베, 셀린느, 토리버치 등 굴지의 브랜드들이 시몬느의 손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회사를 20년쯤 운영했을 때 고비가 찾아왔다. "친구들이 물어봤어요. 핸드백의 뿌리가 뭐냐고, 왜 여자들이 핸드백에 열광하느냐고…."

박 회장은 지난해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 200여억원을 투자해 '시몬느 핸드백 박물관'을 세웠다. 지하 5층, 지상 5층짜리 박물관 내부는 핸드백의 어제·오늘·내일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채웠다. 박 회장은 "여자들에게 가방은 자기표현의 수단이라서 자신을 드러내는 작은 박물관"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선 오는 12월 29일까지 'Bag is Psychology 展: 여자의 가방' 전시도 열린다. 사진작가 김용호와 홍종우가 '가방'을 주제로 작업한 사진을 벽에 걸고, 김현철 정신과 교수가 장 클로드 카프만의 책 '여자의 가방'에 한국적 사색을 더한 텍스트를 바닥에 배치했다. 이번 전시는 시몬느가 2015년 9월 자체 브랜드 '0914' 출시를 앞두고 준비한 아트 프로젝트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 박 회장은 "이제 핸드백에서도 아시아에 주민등록을 둔 브랜드가 나올 때가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중1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고3 때만 빼고 매해 아버지 고깃배에 몸을 실었다. 덕분에 서해안 섬은 다 가봤다. 이젠 전 세계 핸드백에 내 존재를 새기고 싶다"고 말했다. 그에게 핸드백은 끝나지 않는 항해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