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데릴라의 뿌리내리기

몇 해 전, 노점이 없던 거리에 낯선 여인이 나타나 자리를 잡았다. 군데군데 구멍 난 돗자리에 애호박이며, 푸성귀를 펴놓고 있다. 쪼그려 앉은 그녀가 지나치는 사람을 바라보며 눈만 껌뻑인다. 굵고 푸석한 머리카락, 까무잡잡한 얼굴에 쌍꺼풀진 눈, 위로 살짝 올려진 코에 약간 아래로 처진 입매… 한눈에도 필리핀이나 베트남 어느 곳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여성임을 알 수 있었다.

낯선 이국의 환경과 문화에 적응하기도 만만찮은데 길거리 장사를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점포를 운영해도 쉽지 않은데 휑한 인도(人道)에서 야채를 파는 노점상이라니…. 그녀는 수없이 자문했을 성싶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이 일을 꼭 해야만 하나?'

처음에는 상품도, 파는 사람도 관심을 끌지 못했다. 사람들은 무심히 그 앞을 지나칠 뿐이었다. 햇볕에 시드는 채소처럼 그녀의 축 처진 어깨를 보면 안쓰러웠다.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딱히 해줄 게 없다. 하지만 자주 지나치면서 조금씩 팔아주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내게 알은 체를 했다. 웃는 모습이 참 선했다.

문득 밭고랑에 엎드려 풀을 뽑고 손수레를 끌며 품팔이하던 오래전의 누님이 떠올랐다. 몸에 달라붙은 땀이 밴 옷,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는 늘 땀방울을 조롱조롱 달고 있었다. 일곱 식구를 챙겨야 했던, 생존을 위한 치열한 투쟁이었다. 그런 딱한 누님을 닮은 그녀라 더 마음이 쓰였다.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묻다가 필리핀에서 왔고 이름이 데릴라라는 것도 알게 됐다.

그녀의 집은 도심에서 20여 ㎞나 떨어져 있다고 했다. 하우스 안에 작은 방을 들여놓고 살면서 채소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일은 고단하고 생활은 불편했다. 부부가 열심히 땀 흘려 일해도 정작 손에 쥐는 돈은 없었다. 농사가 잘못되면 눈물을 삼켜야 했고, 풍작이면 농가마다 농작물을 한꺼번에 출하해 헐값이 되어버렸다. 생각다 못한 부부가 머리를 마주 대고 내놓은 해법은 아파트단지가 밀집돼 있는 이곳에서 노점을 하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언제부터인가 장사가 잘 되는 모습이다. 2000원짜리 채소바구니들이 담기가 무섭게 비워진다. 볼품없는 꼬부라진 오이가 더 잘 팔렸다. 볏짚 꾸러미 속에서 삐죽이 얼굴을 내민 싱싱한 토종계란은 단연 인기상품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몇 해가 흘렀다. 지금은 한국 말도 잘하는 데다 단골도 있어 판매에 문제가 없다. 사람들이 데릴라의 노점을 찾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는 유기농으로 직접 재배한 싱싱한 채소나 토종계란을 싸게 판다. 좋은 물건을 싸게 사려는 소비자의 심리에 딱 들어맞은 것이다.

데릴라는 정이 많았다. 푸근한 한국 아낙들처럼 단골한테는 듬뿍듬뿍 덤을 얹어줬다. 오히려 처음에 편견으로 약간 거리를 뒀던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겪어 보니 피부색이 다른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언어 소통과 문화의 차이도 마음만 연다면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법이다.

대부분의 다문화가정이 그렇듯 맺어진 인연도 가지가지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녀 역시 아픔이 많았다. 사십이 다 된 나이에 결혼한 그녀는 만혼이라 큰 기대는 안 했지만 십여 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나이 든 아들의 짝만 찾으면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다던 시어머니는 자주 손주 타령을 하며 짜증을 냈다고 한다. 데릴라는 그런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서운했다. 남편도 텔레비전에 아이들이 나오면 좋아라 했고 길거리에서 어린 학생들을 만나면 귀여워했다.

아이 문제를 고심하던 부부는 입양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국내 입양을 고집했지만, 남편이 데릴라의 주장을 받아들여 필리핀에서 궁핍하게 사는 데릴라의 조카를 데려다 키우기로 했다. 작년 8월 부부는 합의대로 네 살 된 여자아이를 데려왔다. 한국에 온 지 일 년도 안 된 딸아이가 자신보다 한국말을 더 잘한다며 그녀는 자랑을 한다.

맏며느리인 데릴라는 건강하고 농사도 잘 짓고 집안일도 잘 챙긴다. 고운 심성에 생활력도 강하다. 그녀에게 반한 시댁 식구들은 아랫동서도 필리핀 처녀를 택할 정도였다.

이제 그녀는 달 밝은 밤에 고향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 비록 길거리지만 싱싱한 채소를 사려고 늘어선 손님들, 절대적 지지와 후원자인 시어머니와 남편, 시동생과 동서, 사랑스러운 딸이 있어 행복하단다.

깊게 뿌리내린 나무를 옮겨 심으면 호되게 몸살이 난다. 수세가 좋은 나무일수록 활착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활착이 어디 나무뿐이겠는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환경을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면 눈물겨운 아픔을 감내해야 한다. 그녀는 잘 이겨냈다. 조금만 더 돈을 모으면 자신의 밭에다 작지만 예쁜 집을 지어 세 식구가 오순도순 살고 싶단다.

농촌에는 서너 집 건너 한 사람꼴로 외국인 며느리들이 늙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산다. 국내 결혼이민자·귀화자가 27만명이고 다문화 가족의 자녀가 17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들 외국인 며느리들이 우리가 못하는 자식의 도리를 대신하고 있다. 어찌 보면 낯 뜨거운 일이기도 하다. 한국이라는 토양에 어렵사리 뿌리내리려는 그들을 우리가 보듬어 안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