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 현장] 테러범의 소굴, 스페인의 굴뚝으로

지난달 31일 스페인 북부 바스크 자치주의 중심 도시 빌바오(Bilbao). 비가 내리는 우중충한 날씨 속에 스페인의 다른 지역에선 보기 어려운 광경들이 눈에 띄었다. 산기슭을 따라 늘어선 공장의 굴뚝들이 쉼 없이 하얀 연기를 토해냈다.

바스크어를 쓰는 근로자들은 스페인 기준으로 이른 아침인 8시부터 공장으로 출근을 서둘렀다. 빌바오항(港)에선 거대한 크레인이 굉음을 내며 컨테이너를 하역했다. 흔히 알고 있는 '태양과 시에스타'의 스페인이 아니라 영국·독일의 공업 도시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근로자들에게서도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엔지니어링 업체 세네르에 근무하는 보르하 사라가(42)씨는 하루 평균 9시간씩 일한다고 했다. 스페인 관습에 따라 점심시간이 2시간이지만, 그는 보통 1시간 안에 해결하고 자리로 돌아온다. 바스크족 직원이 다수인 이 회사에서 시에스타(스페인 사람들이 즐기는 낮잠 시간)는 딴 세상 얘기다. 소수민족인 바스크족은 스페인 문화 시에스타를 즐기지 않는 편이다. 그는 "바스크 근로자의 별명이 '스페인의 독일인'"이라며 "일에 대한 헌신과 근면성은 스페인 다른 지역과 확연히 다른 바스크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스페인의 독일' 바스크

긴 침체에 빠졌던 스페인이 내년부터 성장세를 회복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제조업 중심지 바스크 자치주가 스페인 경제 부흥을 선도하고 있다.

주(州) 총생산이 연 661억유로에 달하는 바스크 자치주는 작년 4분기부터 성장세로 돌아섰다. 1인당 평균 소득은 4만457달러(2012년)로 스페인 전체 평균(3만722달러)을 1만달러 정도 웃돈다. 스페인 지자체 중 단연 1위고, 북부 유럽의 네덜란드와 비슷한 수준이다. 인구는 200만명으로 스페인 전체의 4.5%에 불과하지만 전체 수출의 10% 이상을 차지한다.

바스크 자치주의 신용 등급은 스페인 중앙정부보다 2단계 높은 BBB+다. 경제 위기가 지속된 지난 4년 동안 외국인 직접투자(FDI)가 매년 4%씩 증가해 2011년 87억달러를 유치했다. 세네르나 CAF 같은 바스크 기업들은 지난 5년의 경제 위기 기간에 연 3~10%씩 성장을 기록하며 해외로 팽창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협동조합 몬드라곤, 스페인 최대 전력 업체 이베르드롤라, 프로 축구 프리메라리가의 공식 스폰서이자 스페인 2위 은행 BBVA도 바스크 기업이다. 뿐만 아니라 GE·벤츠·지멘스 등 글로벌 기업들이 이 지역에 공장을 두고 4만명 넘게 고용하고 있다. 덕분에 바스크 자치주의 실업률은 스페인 전국 평균인 26.9%의 절반 수준으로, 유럽연합 평균과 비슷한 편이다.

파이낸셜타임스와 로이터 등 외신들은 바스크 자치주를 "스페인 경제의 엔진"이라고 소개하며 부실 재정에 허덕이는 다른 주들이 바스크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보도했다.

◇부동산 거품 좇지 않고 제조업 매진

1970~80년대 무장(武裝) 테러 조직 ETA의 본거지로 악명 높았던 바스크 지역이 어떻게 스페인 경제의 엔진으로 떠올랐을까. 스페인의 다른 지자체들이 건설 붐에 편승할 당시 묵묵히 제조업에 매진한 것이 주효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스페인 중심부와 2000m급 산맥으로 분리돼 있는 바스크 자치주는 험한 산악 지형에 1년에 200일가량 비가 오는 궂은 기후를 갖고 있다. 게다가 ETA의 무장 독립 투쟁으로 2000년대까지 사상자가 발생했다. 자연히 대규모 부동산 개발이나 관광 붐과 거리가 멀어졌다. 유로화 도입 후 스페인 전역에 걸쳐 부동산·건설·관광 거품이 일었을 때 지리적·정치적인 이유로 소외됐던 것이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1980년에야 처음으로 자치 정부를 갖게 된 바스크는 붐을 따라가기보다 전통 제조업을 발전시켰다. 지리적으로 영국과 스페인 사이 해상 교역 창구 역할을 해온 바스크는 스페인에서 가장 먼저 산업혁명과 축구를 받아들인 곳이다.

주 정부는 법인세를 스페인 다른 지역 표준인 30%보다 낮은 28%로 책정하고 연구·개발(R&D) 중심 과학 단지를 4곳이나 개발했다. 당시 유행하던 금융 등 3차 산업으로 전환이 이뤄지지 않아 다른 주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지만 위기 이후 상황이 뒤바뀐 것이다.

또 바스크 지역은 교육열이 높기로 유명하다. SPRI에 따르면 바스크 자치주는 유럽 전체에서 세 번째로 대학 졸업자 비중이 높은 지역이다. 그만큼 바스크 기업들은 인재 수급에 있어 스페인의 다른 기업들보다 유리한 측면이 있다. 바스크 주민들의 지지를 잃은 ETA가 2011년 무장투쟁 종료를 선언한 것도 외국인 투자 유치를 촉진하는 요소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