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진의 길 위에서] 가을비 맞으며 광릉 숲길을 걸었다

비에 낯을 씻은 당단풍 빨간빛이 새뜻하다. 복자기 붉나무 화살나무 잎이 단풍 못지않게 붉다. 서어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잎도 노을빛이다. 물푸레나무 생강나무 고로쇠나무는 은행잎만큼이나 노랗다. 빨간 건 빨간 대로, 노란 건 노란 대로, 철없이 푸른 건 푸른 대로 한결 맑다. 제 빛깔보다 채도(彩度)가 한두 단계씩 높아졌다. 천 년 숲을 적시는 가을비 덕분이다.

비가 먼지를 가라앉히면서 숲은 진한 가을 내음을 뿜는다. 어릴 적 해 질 무렵 동네를 싸고돌던 밥 짓는 연기 냄새 같다. 쌉싸래한 약초 냄새 같기도 하다. 습지에 쌓여 삭아 가는 낙엽 냄새가 시큼하다. 솔 내음이 알싸하다. 금빛으로 물드는 여든 살 거목 계수나무 밑은 달콤하다. 솜사탕 냄새, 딸기잼 냄새가 난다. 하트 모양 가을 잎에 쌓인 엿당(糖)이 숨구멍으로 달짝지근한 향기를 솔솔 풍긴다.

비는 소리를 낮게 가둔다. 앞서가는 부부가 아기의 팔을 하나씩 붙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아기가 허공에서 발을 구르며 까르르 터뜨리는 웃음이 새소리보다 영롱하다. 잉어가 호숫물 첨벙이는 소리도 코앞인 듯 가깝다.

지난주말 포천에 있는 국립 광릉수목원을 가려고 예약해뒀다. 비 온다는 예보쯤은 무시하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그런데 신문 1면에 미세먼지가 중국에서 엄청 날아온다는 기사가 실렸다. 바깥출입을 삼가란다. 포기하고 집에 앉아 있자니 마당 은행나무가 가랑비에 촉촉이 젖어 간다. 미세먼지고 뭐고, 벌떡 일어섰다.

383번 지방도 따라 광릉 어귀에 들어서면서부터 미소가 솟는다. 길가에 높이 선 소나무 전나무 느티나무들이 안개에 잠겨 있다. 그냥 집에 있었으면 땅을 치고 후회했겠다. 선경(仙境)을 사진에 담고 싶어도 차 세울 곳 마땅찮은 게 아쉬울 뿐이다.

주말 광릉수목원은 3000명만 받는다. 일기예보 덕에 더 한가롭다. 비와 안개와 낙엽 내린 숲길을 젊은 한 쌍이 간다. 제 우산은 접어들고 머리를 연인의 듬직한 어깨에 기대고 간다. 짙은 가을 속을 아빠와 아기가 걷는다. 부부가 걷고 친구가 걷는다. 우비 입은 서너 살 아이들이 고인 물 찰박대며, 강아지처럼 깡충거리며 간다. 동요를 흥얼거린다.

세조는 자기가 묻힐 광릉 터를 마련하고 풀 한 포기도 뽑지 말라 했다. 광릉 숲은 세조 뜻대로 550년을 고이 지났다. 활엽수림이 세월 따라 변해 온 끝에 절정으로 무르익은 극상림(極相林)이 됐다. 키가 몇 십m나 되는 활엽수들이 갖가지 빛깔로 물든 장관은 광릉 숲 말곤 보기 힘들다.

순환로를 잠시 벗어나 '숲 생태 관찰로'를 걸었다. 손대지 않은 원시림을 가까이 보고 호흡하게 꼬불꼬불 데크 길을 깔았다. 숲은 치열한 삶의 경쟁을 접고 고요한 쉼을 준비하고 있다. 낙엽 내음이 구수하다. 미국 청년이 숲길에 삼각대 세우고 망원경을 얹어놓았다. 목에 맨 쌍안경도 번갈아 들여다본다.

"뭘 보느냐"고 물었더니 목소리를 낮춰 "새"라고 한다. 못 알아들었을까 봐 우리말로 "탐조(探鳥)"라고 덧붙이더니 망원경을 보라며 내준다. 앞쪽 키 큰 나무에 새 한 마리가 앉았다 금세 날아간다. 청년은 "귀한 노랑배박새(Yellowbellied tit)가 저 나무에 스무 마리쯤 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광릉 숲이 깊어 탐조꾼도 불러 모으는 모양이다.

자그마한 저수지 육림호(育林湖)변, 통나무로 지은 찻집에 들렀다. 비는 잦아들고 안개는 더 짙어졌다. 테라스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며 호수를 본다. 미세먼지는 벌써 잊었다. 비가 다 씻어 갔을 것이다.

호수 둘레를 걷고 전나무 길로 들어섰다. 아흔 살 전나무들이 꼭대기가 안 보이게 치솟아 600m를 늘어섰다. 1927년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에서 다섯 살 전나무를 가져다 심어 가꿨다. 엄마 격인 월정사 길, 부안 내소사 길과 함께 3대 전나무 길에 꼽힌다. 나무 향이 빗속에 더욱 진하다. '공중의 비타민' 피톤치드가 방향(芳香) 물질, 향기다. 전나무 발치에 빨갛게 선 단풍이 어둑한 숲을 밝힌다.

전나무 숲 지나 언덕을 오르면 동물원이다. 반달가슴곰과 늑대·멧돼지가 철창 가까이 와서 알은체를 한다. 언덕 내려서서 호랑이 우리로 간다. 2005년 중국에서 온 백두산 호랑이가 산다. 새끼를 보려고 한 쌍을 들여왔다가 암놈은 죽고 열두 살 수놈만 홀아비로 남았다. 호랑이 수명이 스무 살 안팎이니 중년에 든 셈이다. 작년 여름과 올봄에 왔을 땐 한구석에서 늘어지게 잠만 자고 있어서 짠했다.

오늘은 보란 듯 철창에 바짝 붙어 끊임없이 오간다. 거센 숨 몰아쉬며 노려본다. 철창을 사이에 뒀지만 겁이 나도록 용맹하다. 가을비가 야성(野性)을 깨웠을까. 호랑이다운 호랑이가 반가웠다.

수목원 한 바퀴 도는 8㎞ 단풍 길을 쉬엄쉬엄 네 시간 넘게 걸었다. 황홀한 만추(晩秋) 속을 헤매며 세상 시름 다 잊었다. 빛 고운 단풍 보겠다고 가을마다 몇백 ㎞를 달려갔다가 실망해 돌아오곤 했다. 집에서 45㎞ 떨어진 곳에 단풍 천국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것도 사람에 치일 걱정 없이 온전히 내 것으로 누렸다.

한강 선유도공원, 서울대공원 산림욕장, 구리 한강시민공원 코스모스, 인천 드림파크 국화, 안산 습지공원 갈대밭…. 서울 사는 맛 나게 가까운 가을 명소 목록이 또 하나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