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話頭… 오직 女子

햇빛 아래 한껏 달뜬 꽃송이, 하늘 위로 무심코 터져버린 불꽃 같기도 했다. 지난달 19일 여의도 IFC 몰에서 열린 패션 디자이너 지춘희의 2014년 봄·여름 컬렉션은 패션쇼라기보단 또 하나의 작은 축제였다. 커튼을 걷어 젖힌 런웨이는 재즈 선율과 박수 소리가 흥건한 공연장으로 변했다. 관객도 어느덧 박수를 따라치고 휘파람을 불었다.

쇼가 끝나고 지춘희에게 "이번 무대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냐"고 물었다. 그는 "여자"라고만 대답했다. "그래요, 여자. '여자를 여자답게 보여주자', 그것 외에 무슨 할 말이 더 있겠어요? 평생 그것만 하기에도 숨 가빴던 걸요…(웃음)."

◇가장 여자 같았던 여자, 엄마

지춘희은 '왜' '어떻게' 패션 디자이너가 됐느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웃한다. "글쎄, 계기 같은 건 없었는데. 어릴 때부터 뭐든 잘 만들었고 그림도 잘 그렸고, 엄마 손을 잡고 구경 다니는 걸 좋아했고. 엄마 옷과 장신구, 그런 걸 보고 자랐고. 옷도 내가 직접 주문해서 입었고. 그러다가 디자이너가 된 거죠."

1960년대 지춘희가 충북 충주에 살던 어린 시절, 어머니는 민소매 블라우스에 목걸이를 하고 매니큐어를 바르고 다녔다. "이모가 골목에서 엄마를 마주치고 너무 부끄러워서 숨었다잖아.(웃음) 그렇게 유난하게 멋을 부리고 다녔어요."

지춘희는 어머니 덕에 어릴 때부터 귀한 옷감과 옷을 만져보고 볼에 비비며 자랐다. 중학교 시절엔 자기 옷은 직접 양장점에 주문해 입었다. "그 시절 꼬마가 트렌치코트나 정장 원피스도 벨벳·코듀로이 같은 옷감으로 주문해서 맞춰 입었으니까요. 그러니 옷을 짓는다는 건 내겐 참 자연스러웠던 일인 거죠."

1976년 서울 명동에 '지 의상실'을 열었다. 좁고 길었던 가게. 쇼윈도에서도 다 볼 수 있도록 옷을 사선으로 내걸었다. 단정한 듯 애교가 넘치는 코트, 새침한 듯 조신한 듯한 원피스, 품위 있으면서도 관능적인 여성 수트. 그건 그의 타고난 장기(長技)였다. "문을 열자마자 손님이 몰려들었어요. '이렇게 여자 같은 옷은 처음이다'라면서. 배워서 되는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엄마와 다니면서 체득한 거였겠죠."

◇당대의 '아이콘'을 만들다

실험도 많이 했다. 1986년 드라마 '사랑과 야망'에 출연한 배우 차화연의 의상을 만들었다. "차화연이 옷 치수를 재러 가게에 왔을 땐 사람들이 밀려드는 바람에 쇼윈도 유리창이 깨지는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1989년엔 가수 나미의 무대의상을 만들었다. 지춘희는 "옷으로 해볼 수 있는 모든 걸 그때 다 해봤다"고 했다. "철사·반짝이·망사로도 옷을 만들고, 요즘 가수 레이디 가가처럼 머리에 기이한 장식도 달아봤다. 파격에 대한 갈증을 그렇게 풀었다."

황신혜·심은하·장진영·이영애·이나영의 옷을 만들면서 '지춘희 옷을 입으면 스타가 된다'는 속설도 생겨났다. 지춘희는 "원래 사람의 얼굴에 관심이 많다. 그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보다 보면 이야기가 하나 둘 떠오른다. 난 그걸 옷으로 옮긴다"고 했다.

◇"낡지 않는 건 결국 자연뿐"

최근 그는 신세계 '마이분', 패션전문지 '보그'와 손을 잡고 'G20'라는 이름의 캐주얼 옷을 내놨다. 20~30대를 겨냥한 코트와 티셔츠, 트레이닝 복으로 채워진 컬렉션이다. 내년엔 젊은 세대를 위한 또 다른 브랜드도 내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지춘희는 "매 순간 젊은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세상 흐름과 내 목소리를 맞춰나가기 위해 매일 아침 신문을 읽고 뉴스를 모두 훑는다"고 했다.

"그래도 제일인 건 역시 자연이에요. 영원히 낡지 않는 건 자연뿐이니까…. 어릴 때 이모를 만나러 가면서 처음 넘었던 문경새재의 그 푸른 빛깔, 산등성이를 감싸던 구름, 아침 풀밭에 나설 때 발목을 휘감는 이슬의 감촉…. 이런 걸 떠올릴 때면 지루한 법이 없어요. 여자와 자연은 언제나 똑같은 법이 없고 늘 새로워요. 난 결국 그걸 그려요. 내 옷이 좀 다르다면, 뭔가 더 자연스럽다면 그 덕분일 거예요. 디자인이란 결국 자연을 닮기 위한 궁극의 몸짓, 아니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