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 전 가수 최백호를 만든 남자… 이번에는 최백호가 그를 만들었다

인연은 37년 전 무명 가수와 풋내기 작곡가 시절 시작됐다. 1976년 최백호에게 데뷔곡을 써줬던 최종혁. 37년 만에 상황은 역전됐다. 12일 미니 앨범 'CHOI'를 발표하는 늦깎이 가수 최종혁의 음반 프로듀서는 최백호다.

11일 서울 잠실에서 만난 두 최(崔)씨와 1976년 서울 명동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야간 업소와 클럽을 전전하던 스물여섯의 최백호와 네 살 위 최종혁, 두 무명(無名)이 서라벌레코드에서 만나 가까워졌다. 서울 명동에서 진탕 술을 마시던 두 사람.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낙엽 지면 서러움이 더해요….' 최백호가 시(詩)처럼 쓴 메모지를 최종혁에게 건넸다. 몇 달 뒤 비 쏟아져 텅 빈 야간 업소 무대에 서 있던 최백호 앞에 비에 흠뻑 젖은 최종혁이 나타났다. "곡조가 나왔다"며 피아노 건반을 격정적으로 두드리며 부른 노래, 1977년 발표된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다.

"그때 선생님의 목소리를 아직도 못 잊는다. 나와 같은 지(G) 마이너 코드, 하지만 한 옥타브 아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묵직하면서도 맑은 중저음!"(최백호)

녹음실 유리창을 사이에 둔 최종혁은 혹독한 조교였다. '가을에~'로 시작하는 첫 소절만 세 시간 반을 반복시켰다. 이 노래로 두 사람의 삶이 바뀌었다. 최백호가 솔로 가수로 승승장구하는 동안 최종혁 역시 '열애'(윤시내) '이별이래'(유열) '당신도 울고 있네요'(김종찬) 등을 히트시키며 80년대 '이별 전문 히트 작곡가'로 떴다. 하지만 작곡으로 이름을 알렸어도 사실 최종혁은 오랫동안 '가수의 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노래? 이 목소리로? 상상도 안 했다."

올봄 미니 앨범을 준비하던 최백호에게 오랜만에 최종혁이 "곡을 주고 싶다"며 직접 부른 음원 '서울 무인도'를 보냈다. '그놈의 웬수 돈이 모자라 돈 돈 돈/모자란 만큼 걸어가다가 택시를 타고 갈까….' 삶의 짠 내 밴 노랫말과 중저음의 목소리, 듣던 최백호는 그 옛날 비 내리던 명동을 떠올렸다. "이 노래는 선생님이 불러야 해요. 취입 준비하세요."

제작비를 도맡은 최백호의 갑작스러운 역공(逆攻). 이번엔 최백호가 유리창 앞에서 "건방지게 하지 말고 겸손하게 부르시라"며 으름장을 놨다. 앨범엔 최백호에게 주려다 되레 자신이 부르게 된 '서울 무인도'와 두 사람 인연이 시작된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두 곡이 실렸다. "내 편곡이 촌스럽다. 다른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며 툴툴거리는 가수를 "그 복고가 포인트니 걱정 말라"고 다독이는 프로듀서. 최백호도 12일 자신의 미니 앨범을 발표한다. 자기 앨범 알리는 데도 코가 석 자일 최백호가 "37년 동안 마음에 품던 일을 실행한다"며 후련하게 웃자, 최종혁이 허허 웃으며 받았다. "노래란 게 누구에겐 희망일 수도 있더라. 나도 이제 누군가에게 희망을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