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끼리 하자" 金九 말에 김일성은 박수 멈췄다

"아이고, 우리 항일 독립운동의 대선배이신 김구 선생을 뵙게 돼서 대단히 영광스럽습니다."

서른일곱 살 김일성의 첫마디였다. 1948년 4월 22일 백범 김구가 반대를 무릅쓰고 남북 연석회의에 참석하러 평양에 간 길이었다. 평양 가는 길 전봇대에는 '김구, 이승만 타도하자'고 표어가 붙어 있었다. 백범이 온다니까 임시방편으로 먹물로 덮었는데 먹물이 마르자 밑에 있는 글자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었다.

1948년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 연석회의 개회식은 김일성 찬양 일색이었다. "아버지(김구)가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반대하기 때문에 이곳에 왔다'고 하자 사람들이 손뼉을 쳐댔다. 그런데 아버지가 '북한에서 단독정부를 세우는 것에도 반대한다'고 하자 바늘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통일은 소련도 미국도 아닌 우리 동족끼리 해야 한다는 말에 손뼉을 치지 않는 것을 보고 통일 정부를 세우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구의 둘째아들 김신(91) 백범기념사업회 회장이 회고록 '조국의 하늘을 날다'(돌베개)를 펴냈다. 독립운동가 가족이 겪은 고난, 인도와 미국에서 비행 훈련을 받던 시절, 6·25전쟁 중 미그-15기를 훔치러 중국 만주까지 갈 뻔한 일, 박정희 대통령과 장제스 총통의 비밀 메시지를 전하던 주중화민국(대만) 대사 시절 등이 담겨 있다. 우리 현대사의 격랑을 체험한 사람이 글로 옮긴 기억이다.

김신은 당시 백범과 함께 김일성을 만나 악수를 나눴다. 김일성은 "ㅇ동무, 아버님을 모시고 오느라 수고 많았소"라고 했다. 2005년 8·15 민족대축전 행사 때 북한 대표단 김기남 일행이 서울에 왔는데 그 일화를 들려줬더니 박수를 쳤다. 북한에서 김일성과 악수한 것은 무척 대단한 일로 여긴다는 것이다.

김신이 공군참모총장일 때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때 유엔군 총사령관 겸 주한미군 사령관이던 카터 매그루더 장군은 경력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았다. 미국과 관계가 좋았던 장성들에게 "압력을 가하든 타이르든 해라. 원대 복귀하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전하라"고 했다. 오판이었다. 매그루더를 만난 자리에서 박정희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이다. 이것이 옳은 일은 아니지만 나라를 바로잡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미국이 무력 진압하면) 서울에 있는 미군과 미국 민간인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 미국은 결국 진압 대신 승인으로 방향을 틀었다.

김신은 "'백범 김구의 가족'이라는 사실은 큰 자랑이자 짐이었다. 우리 현대사의 한 자락을 조금이나마 더 밝혀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책을 썼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