因緣을 끊는 것, 때로는 약

'지금은 비가…'

벼랑에서 만나자
부디 그곳에서 웃어주고
악수도 벼랑에서 목숨처럼 해다오
그러면 나는 노루피를 짜서
네 입에 부어줄까 한다

아 기적같이 부르고 다니는
발길 속으로
지금은 비가…

-조은


태평로의 신문사에서 사직동 시인의 집까지는 걸어서 13분이 걸렸다. 시인 조은(53)이 만 22년 동안 살고 있는 도심의 뒷골목. '최첨단'과 '초고층'이 한 집 걸러인 서울 한복판에서 세월의 더께 뒤집어쓴 한옥과 키 낮은 단층집들이 실핏줄처럼 엉켜 있다. 시인의 집은 자동차 진입이 불가능한 언덕배기 골목, 대지 14평이 채 못 되는 한옥이다. 옹색한 양철문을 밀고 들어가니, 작지만 정갈한 시인의 방이 맞는다. 그는 "이래 봬도 이 안에 30명도 넘게 들어와 먹고 마시며 논 적도 있다"고 했다.

사직동을 찾은 표면적 계기는 최근 시인이 산문집 '또또'(로도스)를 펴냈기 때문. 하지만 수많은 예술가의 쉼터이자 사랑방이었다는 사직동 '조은의 방'을 더 늦기 전에 가보고 싶다는 욕심이 더 컸다. 몇 년째 오늘내일 하던 재개발이 확정되어 이제는 정말 방을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집을 빙 둘러싸고 있는 여덟 집 가운데 벌써 여섯 집이 떠났다"고 했다.

―사직동에서 22년, 이 집에서만 14년이다. 얻은 것과 잃은 것은.

"젊음과 몇몇 친구를 잃었다. 젊음을 잃은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친구를 잃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힘들게 이별을 택했던 내 용기로 인해 그 친구들이 최소한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좀 더 인간적이 될 거라 믿는다. 얻은 거라면 조용히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내면의 힘인 것 같다. 늘 눈앞의 삶이 두려웠는데, 나이 탓인지 노력 탓인지 이젠 두려움이 아닌 차분함이 느껴진다."

12년 전 그의 산문집 '벼랑에서 살다'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이 차가운 대답은 조금 의외일 것이다. 한때 이 방은 형용사 '아늑한'의 동의어였다. 참으로 많은 문인·예술가·지인들이 다녀갔다. 그중에는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영화감독, 트위터에서 존경과 질타를 동시에 받는 작가, 명성 높은 배우와 소설가, 문학을 사랑하던 전직 장관도 있다. 하지만 그중 일부는 이제 시인의 방을 찾지 않는다. 시인은 "1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더 순수해서 많이 왔던 것 같다"며 빙긋 웃었다.

―10년 동안 무엇이 달라졌을까.

"좁은 내 공간에 와서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아' '이렇게 살면 되는 것을!' 하던 사람들은 내게 힘이 되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 가치관은 변했다. '관계'는 정말 힘든 것 같다. (친구들과의) 모든 이별이 잊히지 않고 아프다. 얘기가 이상해질지 모르지만, 나는 위선을 싫어하는 것 같다. 절반은 물론 내 잘못이다. 관계를 성숙시키지 못한 죄, 불편하지 않기 위해 너무도 자주 침묵한 죄… 하지만 음식으로 치면 쓰디쓴 맛이 얼마나 보약이 되었는지 나도 놀란다."

따뜻하고 포근했던 기억만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시인의 18번째 책인 '또또'는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닌 글. '또또'는 원래 시인의 주인집 소유였던 발바리 잡견이었다. 툭하면 주인에게 두들겨 맞아 사람에 대한 공포와 증오로 가득했던 강아지. 그는 "극도의 예민함과 개로서는 가져서는 안 될 자존심을 가졌던 개"라고 썼다. 책은 지난해 인왕산 소나무 아래 묻은 '또또'와 17년 애증의 기록이지만, 책을 덮고 나면 우리 인간의 우정·사랑·증오·이별에 관해 자발적으로 되새기게 된다.

―개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그 안의 사건과 상황이 저절로 인간의 모습과 겹쳐 읽히기 때문일 것이다. 읽은 사람들이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생명의 소중함부터 심지어 자존심을 잃지 않는 것이 어떤 것인지까지 생각하게 됐다는 얘기까지."

―당신은 시인이다. 당신 글의 위력(威力)과 무력(無力)을 느낄 때는.

"내 글이 나를 성장하게 한다는 생각을 할 때. 문학이라는 것이 글을 쓰는 사람 의식에서 시작돼 파장력을 갖는 것인 만큼 그건 정말로 값진 체험이다. 시의 공감대가 미미하다고 느낄 때는 무력해진다. 하늘의 북두칠성처럼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별자리 같은 시를 써야 하는데(웃음)."

그는 한 글에서 "타인에게 친절하라. 그대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지금 그들의 삶에서 아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플라톤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사직동을 낭만과 느림의 미덕으로 예찬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시인의 차가운 고백이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우리는 쓴 약을 통해 성장한다. 시인의 낡은 한옥 지붕 위로 새끼를 품은 어미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생존을 위해 지붕을 넘은 것 같다고 했다. 시인은 며칠 전 그 고양이 모자(母子)를 위한 사료를 몇 부대 들였다.



기사 전문= premiu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