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을지로의 푸시킨을 보며

'상습 지각생' 소동에 묻혔지만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한 일정에는 푸시킨 동상 제막식 참석도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러시아의 문호(文豪)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 촉박한 당일치기 방한에 정상회담 시간까지 줄이면서도 푸틴 대통령은 이날 저녁 을지로 롯데호텔의 동상 제막식에는 참석했다. 푸틴과 러시아의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를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이 동상은 한·러 협력의 상징으로 러시아작가동맹이 비용을 대고 우리 측에서 장소를 댔다고 한다.

푸틴 방한과 같은 날 열린 '한·러 대화(KRD) 포럼'의 문화예술분과위원회에 패널로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러시아 문화 외교의 무대 뒤를 엿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리호마노프 러시아국립도서관장, 노보셀료프 러시아작가동맹 사무국장 등이 발언했는데, 전 세계 20여국에 러시아 문인의 동상을 세웠거나 세울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가령 스리랑카에는 안톤 체호프, 중국에는 푸시킨, 아르헨티나에는 도스토옙스키 식으로. 노보셀료프 사무국장은 공식 토론 시간에 "외교 공관을 통해 각국의 동상 제작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했지만, 쉬는 시간에 들은 우리 측 관계자 얘기는 좀 달랐다. "러시아 쪽에서 푸시킨을 정한 뒤 제작해서 보내온 것"이라는 것이다.

어느 쪽 말이 맞든 중요한 것은 세계 각국에 푸시킨과 체호프, 도스토옙스키의 동상이 서고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라고 해서 젊은이들이 영화나 가요보다 문학을 더 사랑하는 걸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리호마노프 국립도서관장은 "러시아에서는 갈수록 책을 안 읽어 고민인데 한국은 상황이 다르냐"고 진지하게 묻기까지 했으니까. 이날 포럼의 주제는 '한·러 문학 및 예술 교류의 활성화'. 러시아 측 인사들은 "한국에서 작가를 선정하면 러시아에도 동상을 세우겠다"고 했다.

푸시킨과 인연이 있는 시인 중에는 백석(1912~1995)이 있다. 지금 가장 사랑받는 국민 시인의 한 명이자 빼어난 러시아 문학 번역가. 평안도 정주 태생인 그는 광복 이후 고향에 남았고,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서정시 창작이 힘들어지자 번역에 몰두했다. '푸시킨 시집'(1949) '푸시킨 선집'(1955)도 그의 번역이다.

우리 측 패널인 고려대 노문과 석영중 교수는 '토지'의 박경리(1926~2008)를 추천했다. 마침 지난해 '박경리문학상' 수상자가 러시아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70)이기도 했지만, 대지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보여온 러시아 문학의 전통과 박경리 문학의 전통이 정서적 공감대를 이루고 있는 설명이었다.

물론 꼭 문인일 필요도 없다. 인물 선정에는 좀 더 합의가 필요하겠지만, 러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에 그 나라와 인연이 있는 한국 예술가의 동상 건립은 매력적이지 않을까. 비용도 크게 들지 않는다. 을지로에는 푸시킨, 상페테르부르크에는 박경리. 물성(物性)을 가진 한 나라의 예술가가 그 나라 중심부에 선다는 것의 의미. 감각적 한류뿐만 아니라 정신적 문화의 외교 중요성을 여기서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