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고나무의 마법

패션 디자이너 이광희(59)씨는 오랫동안 전·현직 영부인과 재벌가 안주인, 여성 CEO 등 국내 상위 1%가 즐겨 입는 옷을 만드는 '톱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려왔다. 그런 그가 이번 달 초 서울 남산 부티크에서 패션쇼 형식으로 발표한 컬렉션을 두고 사람들은 "조금 의외"라고 말했다. 기존 이광희 부티크의 옷보다 한층 젊고 힘찬 작품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씨는 "20~ 30대 젊은 여성을 위해 새롭게 디자인을 가다듬었다"라고 말했다. 변화의 원인이 대체 뭘까.

12일 만난 이씨는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시작한 봉사활동이 내 패션 디자인에까지 새로운 영감을 줬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2009년부터 내전과 흉년에 시달려온 남수단 주민을 위해 망고나무를 심어주고 살아갈 터전을 짓는 사업을 하고 있다. 그가 2011년 설립한 외교통상부 산하 사단법인 '희망고(HIMANGO)'는 최근 설립 2주년을 맞았다. 이씨는 "그 척박한 아프리카 땅에 나무를 꾸준히 심었더니 그곳 주민들의 삶이 바뀌었다. 이들을 위해 바쁘게 뛰면서 난 덤으로 건강과 활력을 얻었다. 내 패션 디자인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번 컬렉션 '송 투 더 어번 문(Song to the urban moon)'은 일하는 여성을 위해 모직·면·가죽·실크 같은 천연 소재로 만든 정장·코트·드레스 등으로 채워졌다. 또 아프리카 주민들과 축제를 열면서 경험한 강렬하고 다채로운 빛깔은 이번 그의 컬렉션에서 비즈와 시퀸으로 완성한 드레스 위에 녹아들었다.

이씨는 1986년 서울 신라호텔에서 첫 개인 패션쇼를 열면서 데뷔했다. 이후 매년 네 차례의 패션쇼를 쉰 적이 없다. 예술의전당과 국립극장에서도 패션 디자이너 최초로 쇼를 열어 화제를 모았다. 패션 디자이너로서는 누구보다 가파르게 성장해왔지만, 마음 한편엔 늘 짐이 있었다.

목사였던 아버지와 간호사였던 어머니는 6·25전쟁 직후 전남 해남에 내려가 교회를 세우고, 전쟁 고아·미망인을 위해 '해남등대원'을 세웠다. 한 번에 200명 넘는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가르쳤다. 이씨는 "평생 부모님이 그렇게 사시는 걸 보고 자랐다. 디자이너가 돼서도 자선패션쇼를 꾸준히 열었지만, 부모님의 길을 따르고 싶은 갈증이 있었다. 그러다가 2009년 탤런트 김혜자씨와 남수단을 가게 됐고, 그렇게 내 삶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라고 말했다.

남수단엔 어느덧 한 그루의 망고나무 이상의 꿈이 뿌리내렸다. 교육기관과 학교 등이 들어선 복합교육문화센터인 '희망고 빌리지'가 들어섰고, 주민들은 이곳에서 배운 기술로 레스토랑과 가게까지 운영하고 있다. 이씨는 "수단에서 얻은 희망과 가능성이 다시 또 컬렉션이 되고 옷이 된다. 내년 봄 열게 될 패션쇼는 좀 더 대중적이고 역동적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