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방송 꺼라? 우리 동네에선 제일 잘나가

누가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주변에서 떠들면 흔히 하는 소리가 있다. "지방방송 끄세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지방방송'을 아예 '주변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정의 내린다. 서울의 변방으로 치부되는 지방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다. 하지만 이 야박한 정의를 단박에 무색케하는 '지방방송'도 있다. 전주MBC '김차동의 FM모닝쇼'(매일 오전 7시·99.1MHz)와 부산·경남 지역 KNN FM '라기오 성은진의 노래 하나 얘기 둘'(매일 오후 4시·부산 99.9MHz, 창원 102.5MHz, 진주 105.5MHz)이 그 주인공이다.

◇지방방송 끄라고요?… '지역 대표방송'입니다

'김차동의 FM모닝쇼'의 DJ 김차동(53)씨는 1993년 첫 방송 이후 20년 동안 이 프로를 진행했다. 단일 DJ의 단일 방송 20년은 아침 방송과 지역 방송을 통틀어 최초다.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전국 라디오 청취율 조사(2009)에서 전국 1위였던 MBC '이윤철·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시대'가 '김차동…'에 밀려 유일하게 2위를 차지한 곳이 바로 전주다.

지방 방송계의 '컬투쇼'라 불리는 '라기오…'는 인터넷 팬카페 회원 수가 6200여명, 매일 도착하는 청취자 문자메시지만 1만건에 달한다. 라기오(38)씨가 "'소주 안주 베스트3' 같은 게릴라 문자투표가 5분도 안 돼 5000건을 넘기는 경우는 서울에서도 드물걸요"라고 하자, 공동 진행자 성은진(33)씨가 받았다. "부산에서 대형 콘서트 열리면 100% 저희한테 행사 알려 달라는 부탁이 들어옵니다. 청취자에게 드리는 협찬 상품만 40개 정도니까, 이거 읽는 데만 3분 넘게 걸려요."

◇동네친화적 방송

화려한 게스트와 상품 대신 이 프로그램들이 장착한 주무기는 '친근함'이다. "전주역에서 송천역 방향 차량등록사업소 앞 버스·승용차 간 추돌사고 때문에 많이 밀립니다. 추가 제보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15일 오전 7시 교통사고가 발생해 차량 정체가 심해지자 김차동의 숨도 가빠졌다. "아침 출근길에 사고 나거나 공사·낙석으로 길이 막히면 시청자 제보를 받아 실시간 중계합니다. 1995년 만경강 쪽에 짙은 안개로 20중 추돌사고가 난 적이 있었는데, 우리 프로가 추가 사고를 막는 데 꽤 큰 도움이 됐나 봐요. 이듬해 전북경찰청에서 표창장도 받았어요."

'라기오…'의 인기 비결은 코너 이름에서도 눈치 챌 수 있다. 콩트 코너 '오늘은 뭐할낀데?', 스피드게임 '전주(前奏)만 듣고 마차라', 사투리 퀴즈 '사투리 나들이' 등은 모두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코너다. 서울로 이사 간 후에도 인터넷 팟캐스트로 방송 듣고 사연 보내는 이들도 많다. "그런 분들한텐 '서울엔 지방 방송 없나 봐요?'라고 물어보죠, 하하."(성은진) "친한 친구들끼린 그저 방 천장만 보고 누워 있어도 재밌잖아요. 저희 방송을 그 방처럼 생각해주시는 것 같아요."(라기오)

◇DJ는 이웃사촌

김차동은 1994년부터 매일 당도하는 사연 중 5개를 골라 손 편지로 답장을 보낸다. '아드님 100일 축하드립니다' '취직 꿈 꼭 이루세요' 같은 소소한 내용이다. "이걸 코팅해 보관하시는 분도 있대요. 편지 한 통 쓰는 데 15분 걸리는데요. 청취자와 직접 만나는 좋은 기회죠." 두 달에 한 번씩 오프라인 모임도 갖는다. '김차동의 FM모닝쇼'의 류선희 작가는 "여름엔 계곡에 놀러 가고, 연말엔 송년회도 연다"며 "지난달 20주년 기념행사 마치고 팬 40~50명과 같이 밥도 먹었다"고 했다.

"오늘 제가 자연산 광어회 쏩니다." 라기오씨가 지난해 11월 스튜디오를 신사옥으로 옮긴 기념으로 방송 도중 내뱉은 돌발 발언이었다. 순식간 "참가하겠다"는 문자만 1만5000건 쇄도했다. 이날 저녁 선발된 팬 30명이 함양·밀양·기장·양산 등지에서 부산 광안리 회센터로 집결했다. 라씨는 "팬카페 회원들과 '카카오톡' 친구를 맺고, 커플 10쌍의 결혼 주례도 봤다. 방송인이 아니라 거의 친구"라고 했다. 이 방송의 5년 팬이라는 회사원 양기훈(34)씨는 말했다. "작년 겨울 공개 방송 끝나고 기오 형님이랑 팬카페 회원들이랑 남포동에서 소주 한잔했습니다. 이런 방송이 또 어데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