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인 "올해로 등단 55년, 난 아직도 詩의 아기"

"올해로 등단 55년이지만, 나는 아직도 '시의 아기'입니다. 늘 처음 쓰는 것처럼 씁니다. 뜨겁고 울고 싶고 밤을 몽땅 토해버리는 마음으로. 사실은 부끄러워서 소주 두 병을 마시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죽는 날에도 나는 시와 함께 있을 겁니다."

고은(80) 시인이 18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새 시집 '무제 시편'(창비) 출간 기념 간담회를 가졌다. 직전 시집인 '상화 시편: 행성의 사랑' 이후 2년 만이고, 10년 가까이 매년 '노벨문학상 홍역'을 치르며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최근 시점으로부터는 한 달여 만이다. 평소 노벨상 운운을 극도로 꺼리는 시인에게 "내년 발표 때도 댁으로 찾아가야 하느냐"고 격의 없는 인사를 건네자, 그는 웃으며 기자의 가슴을 주먹으로 아프지 않게 쳤다.

'무제 시편'은 1016쪽, 607편에 이르는 대작. 시간으로 따지면 올해 봄부터 여름까지, 공간으로 따지면 이탈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중국 등 3개 대륙에서 체류하거나 여행하면서 '쏟아낸' 열정이다. 숫자로 따지면 하루에 3편꼴. 시인은 "시의 유성우(流星雨)가 밤낮을 모르고 퍼부어 내렸다"고 서문에 썼다. 간담회장에서는 "시에 관한 한 밤낮이 없고, 비바람이 부는 날도, 불지 않는 날도 내게는 시의 날"이라고 덧붙였다. "607편을 쓰는 동안 몇 편을 버렸느냐"는 질문에는 "버린 시편은 거의 없다. 그게 내 결점"이라며 '아기'처럼 웃었다.

607편 중 539편에는 제목이 없다. '무제(無題)'다. 이유를 묻자, "시의 제목 안으로 시를 흡수시키는 게 과연 옳은가 오래 생각했다"면서 "시가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하도록 이름을 주기 싫었다"고 했다. 문학평론가 최원식 인하대 교수는 "'무제'는 제목인 동시에 제목이 아니다"라면서 "찰나에서 찰나로 미끄러지는 죽음의 시편이요, 그 찰나 찰나가 해탈의 이행으로 되는 초월의 시편들"이라고 추천사를 달았다.

시인은 올해 만 80세. 여전히 "낮에는 책, 밤에는 원고지에 열광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프랑스의 폴 발레리, 독일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중국의 이백 등 위대한 시인의 이름과 그들의 영광을 열거했다. 그리고 "이제는 위대한 시의 시대를 지나 시가 고개를 숙여야 할 때이지만, 모두가 시를 버려도 나는 혼자서라도 지키겠다는 심정으로 시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비장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