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방엔 이야기가 한땀한땀

빈티지 아티스트 류은영(39·사진)은 뻔한 가방에 '이야기'를 입히는 사람이다. 유럽과 미국의 벼룩시장을 뒤져서 찾아낸 갖가지 골동품 소품과 빈티지 레이스, 낡은 문장(紋章·emblem), 옛 선물 상자에서 떼어낸 리본…. 이런 것들로 그는 오래된 가방에 갖가지 추억과 이야깃거리를 깁고 또 심는다.

멀쩡한 가방에 괜히 구멍을 내고 바느질 자국을 내는 작업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류은영의 가방은 매년 전 세계 패션 마케터와 전시 기획자 사이에서 조용한 화제를 불러 모은다. 이미 국내 타스칼레 갤러리와 서미&투스 갤러리 전시로 시작, 일본 도쿄와 프랑스 파리, 홍콩과 대만 등에서 전시를 열었고, 이번 달 초까진 상하이에서 전시했다. 내년엔 싱가포르 조이스(Joyce) 백화점에서 전시를 연다.

지난 13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만난 류은영은 "여자들이 애지중지하는 가방 위에 낡은 물건을 두들겨 박고 바느질을 해서 표정을 더한다는 점에서 사람들이 내 작업을 독특하게 느끼는 것 같다"면서 "수십 년 전 사람들의 추억이 깃든 물건과 가방을 엮어 2013년의 누군가에게 건넨다는 점에서 난 시간을 잇는 사람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류씨는 본래 레노마·클럽 모나코·썰스데이 아일랜드 같은 패션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2005년 미국 뉴욕으로 떠나면서 빈티지 아트를 시작했다. 류씨는 "처음엔 그저 취미였다"고 했다.

"2002년인가, 엄마가 물려주신 1970년대 자카드 헝겊 가방이 있었어요. 무척 아끼던 가방인데 실수로 와인을 흘렸어요. 얼룩을 감추려고 빈티지 레이스와 리본을 붙이고 바느질을 했죠. 그런데 주변에서 '예쁘다, 나도 해달라'고 하더라고요(웃음)."

류씨는 그렇게 만든 가방을 모아 2006년 첫 전시를 열었다. 2007년엔 낡은 열쇠와 열쇠 구멍 장식을 달아 꾸민 가방을 모아 '괜찮아(Doesn't matter)'라는 이름으로 전시했다. 류씨는 "살다 보면 때론 눈앞에서 문이 '쾅' 하고 닫히기도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잘 찾아보면 열쇠가 또 보인다. 어떤 일도 결국 풀리기 마련이라는 뜻을 담아 만든 가방"이라고 했다.

모든 가방엔 그녀만의 기억이 녹아있기도 하다. 장 콕토, 프랑수아 트뤼포 같은 프랑스 예술가의 흔적을 좇아 여행을 하며 수집한 골동품으로 만든 가방은 이름도 '장 콕토' '트뤼포'다.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영화 '남과 여'(1966)에 꽂혀 어렵게 구한 오리지널 OST 음반이 분홍색인 것을 보고, 분홍 가방으로 작업한 적도 있다. 그 가방 이름은 당연히 '남과 여'. 류씨는 "모든 가방엔 각각의 사연을 써넣은 편지를 넣어둔다. 나중에 누가 그 가방을 갖게 되더라도 나와 추억을 나누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할리우드 배우 레이철 빌슨, 우리나라 배우 고현정·한가인도 류씨의 오랜 고객. 류씨는 "가방을 만들면서 전 세계 수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의 이야기를 다시 가방에 옮겨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니, 난 결국 가방으로 세상을 연결하는 사람"이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