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손잡고 놀러 소설가 수업 들으러 조용히 시험공부하러 간다, 북카페로

 

가을이 저물어간다. 낙엽은 지고, 바람도 심상찮다. 발걸음이 카페로 향한다. 당장 가진 책이 없어도 좋다. ‘북카페(Book cafe)’가 있으니까. 고즈넉한 데서 편히 차와 음악을 즐기려는 이들을 위해 출판사들이 서울 홍익대 인근 서교동·동교동에 연달아 카페를 열었다. 이곳에선 반품되거나 조금 손상된 ‘리퍼브 도서(Refurbished book)’, 나온 지 오래된 책을 10~50% 할인된 가격에 판매한다.

2011년 기준으로 OECD 가입국 중 독서량 꼴찌. 성인 10명 중 3.5명은 1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 요즘, 출판사 관계자들은 "조금이라도 책을 독자와 더 가깝게 하자는 취지"라고 했다. 출판사 직영 북카페는 홍대 인근에 7곳이 영업 중이다.

쉼표

출판사가 운영하는 북카페이다 보니 원 없이 책에 파묻힐 수 있다. 책을 그저 인테리어 소품으로만 소비하는 여타 북카페와는 다른 점이다. 문학동네가 2011년 3월 서울 서교동 홍대 주차장 골목에 세운 '카페 꼼마'는 60평(198㎡) 남짓한 공간에 마련됐다. 1층에 들어서자 가로 7m·세로 6m의 15단 책장이 위용을 드러낸다. 이 책장에만 2400여 권의 책이 꽂혀있고, 2층 책장엔 800권이 더 있다. 점원은 한국·세계문학, 에세이, 어린이 서적 등 손님이 원하는 책을 천장까지 닿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꺼내준다. 손님이 직접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다. 김재영(33) 점장은 "평일 손님은 하루 400명 정도, 주말은 2배다. 책도 한 달에 3000권 넘게 팔린다"고 했다. 이 북카페는 지난해 6월 서울 동교동에 2호점을 냈다. 이곳 책장 역시 15단이지만 책장 길이는 가로 15m로, 1호점의 2배다. 이색적 분위기가 입소문을 타면서 2011년 10월엔 김연아가 1호점에서 커피 CF를 찍었고, 지난해 12월엔 2호점이 SBS 드라마 '드라마의 제왕', 올해엔 '결혼의 여신' 촬영 장소로 등장하기도 했다. 세 살 된 딸에게 동화책 '어깨동무 내친구'를 읽어주던 회사원 안태희(33)씨는 "일반 카페에 가면 할 게 없으니 아이한테 스마트폰 보여주는 게 전부인데, 이렇게 함께 책도 읽을 수 있어 좋다"고 했다. 2호점 대표 장으뜸(33)씨는 "가끔씩 아이들이 와서 사다리를 타고 놀기도 하고, 하루종일 컴퓨터를 하다 가는 분도 있다"면서 "굳이 책을 읽지 않더라도 책 있는 공간이 편하게 느껴질 수만 있다면 성공"이라고 했다.

느낌표

북카페는 다양한 문화공간으로도 활용된다. 문학과지성사가 2007년 세운 '문지문화원 사이'는 매일 오후 시인이나 소설가로부터 철학, 글쓰기, 영화 수업을 듣는 문화공간. 2011년부터 에스프레소 머신을 들여놓고 카페 공간을 만들었다. 문학과지성사가 펴낸 책 1000권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다. 따로 대출·판매하지는 않는 대신, 복사는 가능하다. 시중에선 구하기 힘든 다큐멘터리나 영상도 비치돼 있어 빔프로젝터를 이용해 볼 수 있다.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카페이다 보니 '작가와의 만남'도 자주 열린다. 창작과비평사가 서교동에 문을 연 '인문카페 창비'에선 지금까지 정호승·함민복 시인, 소설가 정유정·정이현·김려령씨 등 유명 문인이 독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음과모음 사옥 1층에 문을 연 북카페 '자음과모음'은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하고 있다. 정은영 주간은 "내년 2월쯤 카페 뒤편 주차장 공간에 빔프로젝터와 음향기기를 활용한 미디어아트 전시회를 기획하고 있다"고 했다.

말줄임표

집중의 시간을 보내려는 이들을 위한 독서실 같은 북카페도 있다. 디자인북이 운영하는 '북카페 정글'은 국내 최초의 디자이너를 위한 공간. 일러스트, 폰트, 타이포그래피 등 다양한 5000여 권의 디자인 원서(原書)가 카페 곳곳에 꽂혀있다. 최근 일러스트 공부를 시작했다는 손경화(여·37)씨는 "학원 선생님이 추천해 와봤는데, 책도 다양하고 주변에도 다들 디자인 공부를 하는 분들이라 공부하기 편하다"고 했다. 디자인북 김무재 부장은 "21년째 디자인 관련 서적을 취급해왔는데, 비싼 원서를 부담없이 차 마시면서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며 "소문을 타 방송에도 소개가 많이 되고 대학 교수님들이 학생들에게 추천을 해줘 자연스레 브랜드 마케팅도 되고 있다"고 했다.

24시간 북카페도 있다. 다산북스는 지난 7월 서교동에 24시간 북카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열었다. 이 카페는 일요일 자정부터 7시간만 휴점한다. 지난 9일 오전 2시쯤 이곳을 찾았을 때 카페에 있던 사람은 34명. 차 한 잔을 시켜놓고 자리에 앉아 '프랑스시 개론' 같은 두꺼운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뭔가를 두드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말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술취한 손님이 들어와 "여기가 무슨 도서관도 아니고 왜 이렇게 조용하냐"고 호기를 부리다 종업원에게 제지를 당하기도 했다. 종업원 박준영(22)씨는 "시험 기간엔 고등학생들도 부모님과 함께 와서 밤을 새우기도 한다"고 했다. 오전 3시, 한 시간 새 자리를 뜬 건 딱 2명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