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아버지가 그리운 날

11월은 왠지 허무하고 슬프다. 어둑어둑해져 오는 퇴근길이 그렇고 잔바람에도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 때문에 그렇고, 옷깃을 파고드는 찬바람 때문에도 그렇다,
 
메말라가는 산등성이나 들판을 바라보는 것도 슬프다. 거기다 오늘처럼 비라도 내리면 아무리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도 인생에 대해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없다.

오늘은 아버지 기일이다. 성당에 가서 연미사를 신청하고 돌아오는 길. 해마다 이맘 때쯤이면 그 곱던 길가의 단풍잎들이 은행잎들이 잔바람에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안 그래도 마음이 심란한데 차가운 빗속에서 그 낙엽들을 밟으며 걷는 길이 왜 그리 짠하고 가슴 아픈지.

신경숙 씨의 ‘엄마를 부탁해’ 소설 속에서 엄마를 자식들이 너무도 모르고 산 얘기가 가슴이 찡했는데 가슴이 찡하자면 내 아버지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우리 아버지야말로 일밖에 모르시는 분이었다. 늘 작업복에 아침 첫새벽에 나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셨으니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는 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당신이 버신 돈을 만 원 한 장 당신 손으로 쓰신 적이 없지만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번 돈을 아낌없이 쓰신 분이었다.

집에 손님이라도 오시면 늘 어머니가 바빴다. 말씀이 없으신 아버진 인사가 끝나고 나면 천장만 쳐다보는 분이셔서 손님 말상대 하랴 음식준비 하랴, 늘 어머니가 동동거려야했을 만큼 말이 없으신 아버지였다.

어머니 말을 빌리자면 주변머리 없는 우직하기만한 분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디라도 가실라치면 늘 어머니를 앞장을 세우곤 하시던 분이었는데 퇴직을 하시고 얼마 지나고 나신 후 갑자기 아버지가 사라졌다. 아버지를 잘 아는 동네분들이 혼자 가방 들고 나서는 아버지를 보고는 어디 가냐고 잡아도 딸네 집에 살러 간다는 말 한마디를 남겨놓고 사라진 것이다. 딸이라고는 나 하나 였으니 서울 사는 우리 집에 가신다고 갔다는 얘기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어머니의 다급한 전화에 형제들이 다 거리로 나섰다. 누구는 청량리역으로, 누구는 고속버스 터미널에, 누구는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달려나가 하루 종일 고향에서 들어오는 오는 차를 샅샅이 뒤졌지만 아버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지방에 사는 형제들도 서울에서와 같이 각각 움직였지만 밤이 으슥하도록 아버지에겐 연락이 없었다. '두 시간 반이면 서울로 올라 올 텐데', '늦게 터미널로 나가지는 않았는데', 밤 열시가 넘고 열한시가 넘고 시계는 자정을 향해 가는데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차를 타고 경찰서로 향했다. 실종신고를 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경찰서 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이 왜 그리 무섭고 떨리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고 전화 속으로 들리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이미 반죽음이 되어 있었다. 컴컴한 경찰서 마당을 가로질러 사무실로 들어가 실종신고를 접수하려고 아버지의 인적사항을 적어 내려가는데 경찰 한 분이 전화기를 들고 묻는다. '아버지가 000십니까? '라고…

동네 파출소에 있다는 아버지를 찾아 허겁지겁 달려갔다.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서는 딸을 보자마자, 태평한 얼굴의 아버지 첫마디는 ‘나 배고파 죽겠다. 밥 좀 다오.’였다. 이런 기막힌 일이 있는가? 집안 식구들을 하루 종일 골탕을 먹이고 태평스럽게 밥 타령이다. 파출소 옆에 있는 분식집으로 들어가 어떻게 된 건지 지치지종 물었지만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식사만 한다.

지금까지도 우리 형제들은 그 사연을 알지 못 한다. 아버지가 치매에 걸렸다는 걸 그제서 알게 된 것밖에는…. 그 후 아버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식구 중 유일하게 어머니만 알아보더니 몇 달 후에는 그마저도 알지 못 한 채 11월 어느 날 하늘나라로 갔다.

11월이 되면 늘 아버지를 떠올리며 가슴이 아프다. 그렇게 올라온 아버지를 단 며칠이라도 모시고 있을 걸 어쩌자고 다음 날 올라온 어머니를 따라 내려보냈는지. 늘 후회하면 산다지만 마지막 기억의 끈에 매달려 딸을 찾아온 그 아버지를 바쁘다는 핑계로 내려보낸 이런 불효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