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이 없는 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최초로 취임 첫해에 정상회담을 갖지 않는 정상으로 기록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유럽 순방 중에 ‘왜 아베 총리를 만나지 않는가?’라는 일본기자의 질문에 ‘일본의 태도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정상회담은 역효과’라고 잘라 말했다. 발끈한 일본은 ‘한국 포기론’까지 들먹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아베 총리는 최근 BS 아사히와의 인터뷰를 도쿄 시부야(澁谷)에 있는 한국식 불고기(燒肉·야키니쿠) 식당에서 진행했다. 직접 집게를 들고 갈비와 우설·곱창 등을 능숙한 솜씨로 구우면서 인터뷰어로 나선 언론인 스에노부 요시마사(末延吉正)에게 고기 굽는 법과 먹는 법을 설명해주는가 하면, 김치·상추 등으로 쌈을 싸먹었다. 막걸리를 주문하며 “요구르트와 비슷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부인이 한류 팬으로 알려져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던 아베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야키니쿠를 꼽는다. 개인적인 취향이나 정치적 신념은 별개라고 하지만, 아베의 이런 모습은 우리를 헷갈리게 한다. 무언가 공통분모가 있을 것 같으면서도 너무나 극단적으로 멀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갔다. 아베의 심장 속으로. 아베 총리의 심원(心源)을 찾아서 시니어 역사 기행단 36명은 먼저 아베의 고향이자 정치적 뿌리인 야마구치현과 조선에 얽힌 악연(惡緣)을 추적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한일합병의 주역들이 모두 이곳 출신이었고,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를 이끌어낸 것도 이곳 출신 사토수상이었으며, 현해탄에 격랑이 몰아칠 때는 언제나 야마구치현 출신이 총리를 맡고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점에서, 아베의 정치적 DNA가 어떻게 형성되고 이념화되었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알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은 과연 진실인가에 대해 반성도 하면서 답사단은 야마구치와 큐슈를 가르는 관문 해협을 건너 큐슈 지역 답사에 나섰다. 4박 5일 동안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 시모노세키와 큐슈의 구마모토, 가고시마, 미야자키를 종단하는 여정의 두 번째 이야기다.
큐슈에서의 첫 답사는 구마모토성. 임진왜란 때 조선 사람들에게 특히 악명을 떨쳤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7년간에 걸쳐 쌓은 일본의 3대 명성(名城)이다. 기요마사는 울산성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 포위돼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귀국하여, 조선의 산성(山城) 축성술을 응용하여 이 성을 쌓았다.
이때 울산에서 데려갔던 석공과 토목 장인들이 모여 살았던 ‘우루산마치(蔚山町)’가 지금도 전차역으로 남아 있다. 구마모토의 명물 말고기 육회가 유명한 것도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성에 갇혀 있을 때 말을 잡아 연명한 데서 유래됐다고 전한다.
울산성 전투는 1597년 12월 권율 장군의 조선·명나라 연합군 5만 명이 가토군을 포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가토군은 5천여 명 남짓. 추운 겨울 날씨와 굶주림, 갈증으로 아사 직전의 가토군은 이듬해 1월 일본의 지원군에 힘입어 겨우 포위망을 뚫고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기요마사는 울산성 전투의 경험을 잊지 않고 농성전(籠城戰)에 대비한 철옹성을 구마모토에 쌓기 시작했다. 구마모토성은 다른 성과는 달리 성벽이 안으로 휘어 있는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울산성에서의 전투 경험으로 적이 성벽을 쉽게 올라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사무라이가 울고 가는 성’으로 알려져 있다.
기요마사가 남긴 이 철옹성이 후일 메이지유신의 물줄기를 돌리는 결정적인 방어선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1877년 2월 메이지유신에 반기를 들고 세이난 전쟁을 일으킨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쓰마 (지금의 가고시마현)군은 큐슈를 북상하여 본토에 상륙하는 가도에 버티고 있는 이곳 구마모토성을 제일 먼저 공략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제일의 사무라이 군단이었던 사쓰마군은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이 방어선을 넘지 못하고 괴멸됐다. 이 공성전에서 방어군이 사쓰마군의 집요한 공격을 무려 50일간이나 완강하게 버티면서 정부군이 전열을 정비하여 반격할 시간을 벌어 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사쓰마군이 정부군을 물리치고 북상하여 본토에까지 진군했더라면, 그 한해 전인 1876년 강화도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 병탄의 첫발을 내디뎠던 일본은 정한론(征韓論)을 부르짖었던 사이고 다카모리를 앞세워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를 일이다.
반면에, 국력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그때 차라리 조선이 일본과 부딪쳤다면 임진왜란처럼 초기에는 밀려도 결국은 일본을 밀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도 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모두 승리하고 욱일승천의 기세로 조선을 밀고 들어오던 1905년의 일본과 그때의 일본은 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에는 기회일 수도 있었던 사이고 다카모리의 반란을 저지한 일등공신이 바로 구마모토성을 쌓은 가토 기요마사였던 셈이다. 구마모토에서 가토 기요마사에 대한 숭배는 거의 절대적이다. 조선에서는 가토군의 살인, 약탈행위에 치를 떨어 기요마사의 ‘기’를 귀신 ‘귀(鬼)’ 자로 고쳐 ‘귀요마사’로 불렀을 정도로 악명을 떨쳤다.
임진왜란에서 유래한 민요 ‘쾌지나 칭칭나네’도 남도 사람들이 ‘쾌재라 청정이 나가네’라고 했던 말에서 유래됐다고 할 정도로 조선에는 깊은 상처를 남긴 인물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부하들에게 따뜻한 덕장의 표본으로 알려져 있다.
구마모토성 뒤편에 가토 기요마사가 어머니를 위해 세운 보리사인 혼묘지(本妙寺)가 있는데, 매년 기요마사의 기일에는 그를 기리는 보은공양제가 열려 수십 명이 몇 날 며칠 동안 밤을 새워 6만 9천여 자의 법화경을 손으로 써서 바치는 사경회(寫經會)가 열린다.
바로 이 사경회를 처음으로 시작한 인물이 임진왜란 때 경남 하동에서 기요마사에게 끌려와 혼묘지의 주지를 지낸 일요상인(日遙上人) 여대남(余大男)이다. 구마모토 사람들의 기요마사에 대한 절대적 숭배의 전통에 정점을 찍는 행사가 바로 이 사경회인데, 그 전통을 다름 아닌 조선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기막힌 역사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경회가 열릴 때면 혼묘지 뒤편에 있는 그의 묘전에는 ‘나무청정공대존의南無淸正公大尊儀’라는 깃발이 걸린다. 혼묘지 뒷산 정상에 세워져 있는 그의 동상 좌대는 부처님을 모실 때나 사용하는 연화대(蓮花臺). 모시는 정도가 그의 부처님 수준이다. 한 인물을 놓고 극과 극으로 갈린 한국과 일본의 지극히 상반된 관점이 오늘날 한일 간 갈등의 현주소를 상징한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 상반된 이미지 못지않게 극과 극으로 대조되는 또 하나의 발자취를 조선과 일본에 동시에 남겨 놓았다.
임진왜란으로 일본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던 조선 선비의 자존심을 세워준 일본인이 있다.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으로 내침하였으나, 조선의 문물이 뛰어남을 흠모하여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한 사야가(沙也可), 즉 김충선(金忠善)공이다.
투항 뒤 조총을 개량하여 조선군의 전력을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했고, 누차 큰 공을 세워 도원수 권율, 어사 한준겸의 주청으로 김해 김씨 성과 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자헌대부에 올랐다. 임금이 하사한 성씨라고 해서 그 후손들을 사성(賜姓) 김해 김씨라고 부른다.
사야가의 투항이 일본에 얼마나 치욕적이었던지, 일본강점기 조선총독부는 특별조사까지 벌여서 당시 기요마사의 휘하에는 그런 장수가 없었다는 결론을 일방적으로 내리고 이 사실을 덮었다. 일본에 사야가의 투항이 치욕이었다면 조선에는 김환(金宦)이라는 인물이 있다.
가토 기요마사 무덤 좌우측에는 기요마사의 가신 2명의 묘가 같이 있다. 오른쪽에는 수석가로였던 카네요시(兼能), 왼쪽에는 조선인 김환의 묘가 기요마사를 시위하듯 좌우를 지키고 있다. 카네요시는 기요마사의 수석가로로 1611년 6월 24일 기요마사의 사망에 비탄에 빠져 다음날 할복 순사, 기요마사 묘 옆에 순장되었다.
이 정도의 거물과 나란히 묻힐 수 있었던 김환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묘비명은 ‘조선인 김환묘’로 되어 있다. 관직명은 없다. 사야가의 기록이 일본에 없는 것처럼 김환의 기록도 조선에는 없다. 일본 쪽의 기록에 따르면, 김환은 기요마사가 함경도에서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를 인질로 잡았을 때 내시로 있다가 기요마사에게 귀순한 것으로 돼 있다.
당시 임해군은 순화군과 함께 함경도에서 선무 겸 모병을 하기 위해 내려갔으나, 오히려 폭정을 자행하다 회령부의 아전으로 유배돼 있던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으로 사로잡혀 기요마사에게 넘겨졌다. 김환은 이때 기요마사에게 투항하여 일본에 따라갔다고 한다. 기요마사로부터 토목과 건축을 배워 구마모토성 축성에도 상당한 공을 세웠는데, 본래 총명하여 기요마사의 신임을 받아 가록 200석의 가신이 되었다.
카네요시와 같이 기요마사가 죽은 다음 날 할복하여 순사 하였기에 기요마사의 묘 옆에 같이 안장되었다는 인물이다. 조선인으로 일본 무장을 따라 할복 순사하였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충격적이지만, 우리는 사야가의 경우만 치켜세우고 김환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했다는 점에서 깊은 자괴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김환이 시종했다고 하는 임해군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성격이 포악하고 난행(亂行)을 일삼아 일찍이 왕재에서 밀려난 인물이다. 동생인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도 반역을 도모하다 사사됐다. 이런 인물 밑에서 어린 김환이 보았던 조선 지배층의 모습과 기요마사의 엄정한 군기를 보고 느낀 괴리감은 상당했을 것이다.
냉정하게 보면, 사야가가 조선에서 보았던 것은 일본 지도층이 갖고 있지 못했던 것(높은 문물과 학식)이었고, 김환이 기요마사에게 보았던 것은 조선 지배층이 백성에게 베풀지 못했던 것(규율에 의한 엄정한 통치)이었다. 당시 서로에게 부족했던 부분에 끌린 두 사람의 투항을 놓고, 일본은 사야가를 부인하고 조선은 김환을 외면해 왔다.
그런다고 두 사람의 존재가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이 국경을 넘게 했던 상호 간의 결점이 그로써 덮어지는 것도 아니다. 의도적인 망각은 그만두고 역사의 진실을 먼저 직시하는 쪽이 이 길고 긴 역사의 전쟁에서 승리자가 될 것이다. 야키니쿠를 즐겨 먹는다는 아베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우리도 스시나 즐겨 먹고 외면해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