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정원의 대문이 열렸다.
새로운 명소로 떠 오르고 있는 경복궁 서쪽 마을, 인왕산 기슭의 있는 통인동, 청운동, 누상동, 누하동, 필운동, 옥인동, 사직동이 몇년 전부터 서촌 마을로 불리고 있다. 평범해 보이는 서촌 마을의 골목길, 개발이 멈춘 이 동네는 그래서 옛 풍경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정겹게 느껴지는 곳이다.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까지도 즐겨찾는 북촌에 이어 국제적인 명소로 떠오른 곳이다. 통인시장을 지나 옥인동 골목을 돌아서 인왕산 끝자락쯤 가다 보면 '종로 구립 박노수 미술관'을 만나게 된다. 이 미술관은 해방 후 한국화 1세대로 불리는 남정 박노수의 생가이기도 하다.
지난 2월 유명을 달리한 박노수 화백은 충남 연기군 출생으로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53년 대한민국 국무총리상.1955년 대통령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등을 수훈했다. 그의 예술은 전통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독자적인 남정식 화풍을 구축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강렬한 색감으로 한국화의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재탄생시킨 거장이다.
인근 주민들이 '비밀의 정원'이라 부를 만큼 베일에 싸여 있던 박화백의 집 대문이 드디어 활짝 열렸다. 1937년경 화신백화점과 현재 간송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 박길룡이 한옥 건축기술에 중국인 기술자들이 참여해서 한식과 서양식 절충 건축기법으로 지은 2층 벽돌 집이다.
1층은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어 있고 2층은 마루방 구조로 되어 있으며 안쪽으로 벽난로를 3개나 설치 하는등, 그시대에는 흔히 볼 수 없었던 호사스러운 집이다. 이 가옥은 조선후기 친일파인 윤덕영이 그의 딸을 위해 좋은 터를 잡아 지은 집인데, 광복 후 수 차례 소유주가 바뀌다 1973년 박노수 화백이 매입하여 2011년 말까지 거주하던 곳이다.
1991년 이 가옥의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문화재 자료 1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1930년대 후반의 한국인 건축가의 저택 설계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박화백의 가족들은 가옥과 함께 소장해온 고미술, 골동품, 고가구, 수석 등 천여 점을 기증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종로 구립 박노수 미술관'이 탄생하였다.
현관을 들어서면 추사 김정희의 글씨인 '여의륜'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 집에 들어오는 사람은 만사가 뜻대로 잘 돌아간다는 뜻이라 한다. 미술관에는 <달과 소년>이라는 주제로 박화백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각 전시실은 엣 가옥을 그대로 살려 놓았으며 드로잉을 비롯해 소재별 작품 30여 점이 걸려있다.
푸르다 못해 진한 물빛이 도는 버드나무 사이에 한복을 입은 소년이 혼자 서 있는 그림 '류하'가 제일 먼저 관람객과 만나게 된다. 한쪽 구석에 있는 벽난로는 훈기가 느껴지는 듯 따듯하게 보인다. 2층으로 올라가면 습작 스케치로 보이는 청년의 그림이 있고, 그 앞에 앙징맞은 다락방은 동화 속에서 본 듯한 작고 귀여운 방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그덕거리는 마룻 바닥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마당은 또 하나의 전시관이다. 갖가지 모양의 수석과 괴석들, 석등이 놓여져 있고,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잘 익은 감까지도 작품같아 보인다. 마당 한 쪽으로 난 좁다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대나무숲으로 이루어진 짧지만 아름다운 산책길도 만들어져 있다. 산비탈을 그대로 이용한 산책로가 인상적이다.
이 미술관은 배우 이병헌과 결혼한 아름다운 여배우 이민정의 외갓집이라고 한다. 외할아버지인 박노수 화백의 아름다운 사회 환원이 없었다면 볼 수 없었던, 아름답고도 귀한 우리의 문화 유산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