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고 싶은 화장품" 女心을 사로잡은 남자

경기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매출 타격을 크게 입은 분야 가운데 하나가 고가(高價) 화장품이다. 백화점 매출이 뚝 떨어지는 바람에 작년 하반기 일부 명품 브랜드는 이례적으로 국내 백화점 판매 가격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명품 화장품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는 프랑스 브랜드 시슬리(Sisley)는 할인 정책을 쓰지 않고도 오히려 매출이 늘었다.

국내뿐 아니다. 미 경제 전문지(誌) 포브스(Forbes)는 작년 말 "시슬리의 크림 제품 수요자가 너무 많아 온라인 숍에서 1인당 월 6개까지만 구매할 수 있도록 제한을 두기까지 했다"고 보도했다. 시슬리의 연매출은 2004년 4억2900만달러에서 2011년엔 7억6870만달러로 갑절 가까이 성장했다. 글로벌 경기 불황 속에서 일군 실적이다.

최근 한국을 찾은 필립 도르나노(d'Ornano·49) 시슬리 CEO는 "오랜 기간 탁월한 제품을 통해 고객들과 신뢰를 쌓았기 때문에 경제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화장품 시장은 전 세계 수많은 브랜드의 각축장이지요. 살벌한 경쟁 속에서 탁월한 제품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시슬리는 1976년 도르나노 CEO의 부모가 만든 회사로 현재 도르나노가 대(代)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 파리정치대학에서 법학·정치학·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원래 작가나 저널리스트를 꿈꿨지만 큰형이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가업을 잇게 됐다.

시슬리는 제품 하나를 출시하는 데 오랜 시간을 들인다. 제품 하나 만드는 데 10년이 걸리기도 했다. 비즈니스 측면에서 볼 땐 그것이 단점이 될 수 있지만 도르나노 CEO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이가 '아직도 개발 중인 거야? 왜 좀 더 빨리 시장에 물건을 내놓지 않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상의 제품을 출시하는 것이 고객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시슬리는 가족 경영 체제(아버지인 위베르와 어머니 이사벨이 창업자)이기 때문에 쉴 새 없이 신제품을 내는 데 치중하지 않고 우리의 방식을 고수할 수 있었습니다."

시슬리는 1976년 설립 당시 민간요법에 이용되는 여러 가지 식물 추출물을 활용한 순식물성 화장품을 업계 최초로 선보였다. 당시로선 이례적인 시도였지만 현재는 명품 화장품 브랜드가 식물 성분과 한방 재료를 활용한 제품을 잇따라 출시해 트렌드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도르나노 CEO는 "한의학이 천연 재료를 활용해서인지 특히 한국 소비자들이 시슬리 제품을 편안하게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은 프랑스에 이어 시슬리 2위 소비국이다.

도르나노 CEO는 "프랑스에서는 제품을 판매할 때 사용법만 알려주면 되지만 한국 소비자들은 화장품에 대한 지식이 많아서 사용 순서와 성분, 같이 쓰면 좋은 제품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그는 한국 시장만큼이나 한국의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깊다. 한국 작가 가운데 황석영을 좋아하고, 최근엔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작가 이창래의 '제스처 라이프'와 전도연이 주연한 영화 '하녀'를 인상 있게 봤다고 했다.

도르나노 CEO는 최근엔 '신(新)성장 동력'으로 면세점 사업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인천국제공항엔 세계 최대 시슬리 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향후 중국에서도 면세점 판매에 더 주력할 계획이다. "공항이 쇼핑도 하고 문화도 즐기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고급 백화점에서와 마찬가지로 공항에서도 고객들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제품을 선택할 수 있도록 상담 서비스를 강화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