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원 아프리카 기원설에 反旗… 화석·DNA 등 치밀한 연구로 입증 "'맥아더상'은 천재들에게 주는 상? 난 좋아하는 공부 열심히 했을 뿐"
과학은 기존 이론에 정면으로 도전한 과학자들에 의해 발전해왔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주장한 갈릴레이나, 뉴턴의 권위에 도전한 아인슈타인이 그랬다. 미국 카네기 자연사박물관의 크리스토퍼 비어드(K. Christopher Beard·51) 박사도 1994년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인간과 원숭이의 공통 조상인 유인원(類人猿)은 아시아에서 처음 나타났다"며 기존의 아프리카 기원설에 반기를 들었다. 그의 나이 32세 때였다.
"이름도 생소한 젊은이가 학계 주류에 정면으로 배치된 주장을 했으니 바로 '미쳤다(Crazy)'는 반응이 나왔어요." 이화여대 영장류연구소 초청으로 방한한 비어드 박사는 19일 "지금으로부터 5000만년 전 아시아에 인간과 원숭이의 공통 조상이 있었는데, 일부가 아프리카로 가 현재 영장류의 조상이 됐다"고 말했다. 인류 조상의 본적은 아프리카가 아니라 아시아라는 것이다. 아시아에 그대로 남은 유인원은 빙하기에 멸종된 것으로 그는 보고 있다.
지난 19일 서울 이화여대 자연사박물관 수장고에서 미국 카네기 자연사박물관 크리스토퍼 비어드 박사가 박제 동물들을 관람하다 활짝 웃고 있다. /이덕훈 기자
비어드 박사의 주장은 단순한 젊은이의 객기가 아니었다. 화석과 지각 이동, DNA 분석 등을 섭렵한 치밀한 융합 연구의 결과였다. 비어드 박사는 "인간과 원숭이의 공통 조상이 나타난 5000만년 전 아프리카는 다른 대륙과 떨어져 고립된 생태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말했다. 비어드 박사는 중국에서 인간과 원숭이의 공통 조상으로 보이는 유인원 화석을 발굴했는데, 이 화석이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것과 흡사했다. 그는 이를 근거로 유인원이 아시아에서 아프리카로 이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중국과 아프리카를 잇는 미얀마와 리비아에서도 흡사한 3800만년 전 유인원 화석이 나왔다. 화석의 형태뿐 아니라 DNA 분석 결과도 이를 뒷받침했다.
그렇다면 인간과 원숭이의 공통 조상은 어떻게 아시아에서 아프리카까지 이동할 수 있었을까. 비어드 박사는 "당시 지각 활동으로 바다를 떠다니던 작은 섬들이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며 "쥐만 한 크기에 몸무게가 최대 200g밖에 되지 않는 유인원이 태풍 속에 나무를 꼭 붙잡고 떠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인류에게 항해의 본능이 생겼는지도 모르죠."
비어드 박사는 이 연구로 2000년 '천재들의 상'이라고 불리는 맥아더상(MacArthur Fellowship)을 받았다. 보험회사로 부를 모은 존 맥아더가 세운 맥아더 재단은 매년 다양한 분야에서 창의적인 인재를 20~30명씩 뽑아 각각 50만달러의 상금을 수여한다. 그는 "화석 발굴을 위해 티베트로 떠나기 직전에 수상 사실을 알리는 전화를 받고 멍했던 기억이 난다"며 "나는 결코 천재는 아니었고, 다만 좋아하는 공부를 열심히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과학자는 두 가지 임무가 있어요. 하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연구 결과를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죠. 이번엔 두 번째 임무로 한국에 왔습니다." 그는 21일 이대에서 '아시아를 떠나 아프리카로'라는 제목의 강연회를 가졌다. 비어드 박사는 "아이들은 공룡을 통해 처음으로 과학에 흥미를 갖는다"며 "공룡을 처음 볼 때처럼 재미있게 교육한다면 성인들도 얼마든지 과학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어드 박사는 노스캐롤라이나대에서 인류학과 동물학을 공부하고 존스홉킨스 의대에서 진화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 편만 발표해도 부러움을 받는 학술지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지금까지 논문 10편을 발표했다. 비어드 박사는 "인류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는 누구나 궁금해하는 사항"이라며 "세계적인 저널일수록 과학계와 일반인이 모두 관심이 있는 주제에 대한 논문을 선호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