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의 브레인 스토리] [60] 사람은 옷을 만들고 옷은 사람을 만든다

얼마 전 건강검진 받으러 갔었다. 해마다 느끼는 거지만 적어도 건강보험제도만큼은 우리나라가 선진국 수준인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대부분 선진국들보다 더 효율적인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바마 대통령의 의료보험 개혁이 겪는 어려움에서도 보듯, 미국은 건강 관리에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하면서도 가장 비싸고 비효율적인 의료보험제도를 가지고 있다. 반대로 대부분 유럽 국가들은 치료비 전체가 보험 처리 되어 심각한 재정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건강검진을 받게 되면 우선 헐렁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물론 빠른 진료를 위해 디자인된 옷이겠지만, 편한 환자복을 입는 순간 갑자기 어딘가 아픈 것 같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일까? 헐렁한 파란 환자복을 입고 검정 또는 핑크색 슬리퍼를 싣는 순간 대기업 임원도, 기자도, 교수도, 국회의원도 모두 '환자'가 된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나 간호사의 명령에 복종하게 되고 그들이 갑자기 신(神)같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얀 옷이면 갑(甲), 파란 옷이면 을(乙)이다.

사실 옷이 인간의 상태, 성격은 물론이고 개개인의 비전과 자신감까지 좌우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고대 군사들 사이엔 누가 더 멋진 갑옷과 더 화려한 깃털을 단 투구를 가졌는지가 전투의 승산을 좌우하곤 했다. 태어날 당시 산파의 실수로 왼손을 못 쓰게 된 마지막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그렇기에 자신의 열등감을 전설에나 나올 법한 '판타지 유니폼'을 통해 감추려 하지 않았던가? 반대로 감옥에 갇힌 죄인들에겐 최대한 자신감을 감소시키는 옷이 제공된다. 유대인 수용소에선 남녀노소 누구나 모두 속옷도 없이 1~2치수 더 큰 옷을 입게 했다. 반짝거리는 가죽 부츠와 몸에 착 달라붙는 유니폼을 입은 독일 군인들 옆에서 속옷도 입지 않은 자신들을 비교하면 주눅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뇌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하는 기계가 아니다. 뇌는 단지 외부 세상과 내 몸의 상태를 최대한 정당화할 수 있는 설명을 찾고 있을 뿐이다. 영웅 같은 옷을 입으면 나 자신을 영웅으로 착각하고, 속옷도 없는 헐렁한 옷을 입으면 마음 역시 약해지고 허물어지게 된다. 수소폭탄을 개발한 구(舊)소련의 천재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인권 활동가로 수십년간 감금 생활을 하는 동안 칼과 포크 사용이 금지되었었다. 어린아이같이 포크와 칼이 아닌 스푼으로만 음식을 먹게 함으로써 사하로프를 어린아이같이 나약하게 만들려 했던 것이다.

얼마 전 미국에서 한 시민단체가 노숙자 생활을 하던 퇴역 군인을 다시 깔끔하고 멋진 모습으로 탈바꿈시켜주는 과정을 인터넷에 올려 화제가 되고 있다. 노숙자 모습으로 인생을 포기하고 살던 사람에게 자신의 '모습'을 바꿈으로써 그의 태도와 꿈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뇌 과학적으로 충분히 근거 있는 희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