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1.27 09:14

MEMORIES

다시 복고 열풍이 불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를 가장 반색하며 맞을 이들은 5060 세대가 아닐까. 어느 때보다 다사다난했던 1980년대, 뜨거운 청춘의 시절을 보낸 주인공. 돌아보면 당시는 어두웠고 힘들었으며 아팠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즐겁고 값진 추억은 켜켜이 쌓여 한 권의 두꺼운 앨범으로 가슴 한켠에 꽂혀 있다. “이상하게 나이 들면서 옛날 생각이 더 많이 난다. 마치 아직 그 속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옛 사진이나 물건을 만나면 더없이 반갑고 감회가 새롭다”는 이들을 위해 준비했다.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키워드.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그때로 잠시 돌아가 보자.


카세트

카세트
커다랗고 네모난 카세트에서 테이프가 돌아가는 광경 역시 1980년대의 산물. 1970년대 말 보급되기 시작한 카세트는 1980년대에 이르러 절정을 맞는다. 금성사(현 LG전자)는 1979년 스테레오 카세트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분야의 혁명이라면 ‘워크맨’의 등장을 들 수 있다. 1979년 휴대용(소형) 스테레오 카세트 형태로 일본 소니에서 출시한 워크맨은 라디오와 녹음 기능까지 추가된 것으로, 대학생은 물론 중고생들까지 한 번에 매료시켰다. 하지만 워크맨도 세월을 이기진 못했다. 소니가 조만간 워크맨 생산을 중단한다는 씁쓸한 소식.


영화 ‘라붐’과 소피 마르소

소피 마르소
1980년 개봉한 영화 ‘라붐’의 소피 마르소는 겨우 열다섯 살 소녀. 그러나 전 세계 남성들은 모두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남자 주인공이 소피 마르소의 귀에 헤드폰을 씌워주는 장면과 ‘라붐’의 주제곡인 리처드 샌더슨의 ‘Reality’는 지금까지 두고두고 회자되는 고전이다.


포니 자동차

포니 자동차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 자동차 모델 ‘포니’는 1980년대 초 거리를 휩쓸었다. 한국인의 체격과 도로 사정에 맞는 소형차인 데다 내구성이 뛰어나 단숨에 국민자동차 자리에 올랐다. 1976년 현대자동차가 처음 포니1을 선보일 당시 가격은 220만 원대(국수 한 그릇 값이 200원 정도였다). 첫해 벌써 45%에 육박한 시장점유율을 보였다. 1982년 포니2, 1985년 포니 엑셀 등이 이어 출시됐다. 그리고 몇 년 후인 1987년 포니 승용차의 생산은 완전히 중단됐다.


존 레논

존 레논
세계적인 록 밴드 ‘비틀스’의 존 레논이 1980년 12월 광팬의 총격으로 숨을 거뒀다. 전 세계 팬들은 그야말로 패닉 상태. 사망 바로 3주 전 발매한 앨범 ‘더블 판타지(Double Fantasy)’가 그의 유작으로 남았다. 전위예술가인 부인 오노 요코와 함께한 이 앨범은 당시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인문서적

인문서적
대학 내에는 쿠사(KUSA), 맑스철학연구회 등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유서 깊은 서클들이 즐비했다. 학생들은 강만길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1978) 같은 역사서나 인문서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6), 김성동의 <만다라>(1978),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1980), 김홍신의 <인간시장>(1981) 등이 널리 읽혔다. 사회 내 비판적 담론을 형성하면서 많은 독자를 거느린 계간지 <창작과비평>은 1980년 봄 15호를 발간했는데 이번 겨울에 어느덧 162호를 낸다.


신촌

신촌
1980년의 대학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는 바로 다방. 휴대폰은 커녕 삐삐도 없던 시절, 다방은 요긴한 연락 창구가 돼주었다. 신촌 독수리다방 등지의 구석 게시판에는 ‘나 기다리다 간다. 내일 다시 보자’ 같은 메모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사연과 함께 신청한 음악을 듣는 것은 다방에서 누릴 수 있었던 호사 중 하나.

1970년대를 대표하는 세시봉이나 양희은이 1980년에도 여전히 인기를 누렸고, 대만 가수 진추하의 ‘One Summer Night’ 같은 곡이 한동안 귀를 사로잡았다. 대학가 술집에서는 술값 대신 학생증이나 시계, 전자계산기 등을 맡아주는 따뜻한(!) 광경이 자주 연출됐고, 300~400원에 칼국수나 수제비를 그득 채워주는 밥집이 많았다.


비엔나커피

비엔나커피
‘다방커피’가 점령한 시절(시골에선 쌍화차처럼 커피에 달걀을 띄워주기도 하던 시절), 명동 등 시내 일부 격조 있는(!) 커피숍에선 비엔나커피를 선보였다. 아메리카노 위에 하얀 휘핑크림을 얹은 비엔나커피는 1980년 당시만 해도 신문물이었다. 미팅에 나선 남성이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잘 보이고 싶을 때면 어렵사리 주문하곤 했던 것. 참고로 지금까지 우리 입맛을 길들이고 있는 커피믹스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은 동서식품이다. 1976년의 일. 그 덕분에 1980년대부터 인스턴트 커피믹스는 빠르게 대중화됐다.


교련복과 조다쉬 청바지

교련복과 조다쉬 청바지
지금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 대학생 패션 역시 청바지와 티셔츠로 대변된다. 패션에 민감한 이라면 조다쉬 청바지나 나이키 운동화를 하나쯤 소지했을 법하다. 반도패션(현 LG패션)이 미국 브랜드 조다쉬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것은 1982년. 이후 조다쉬 청바지는 젊은이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특유의 말 머리가 그려진 로고를 비슷하게 만들어 붙인 ‘짝퉁’도 여럿 등장했을 정도. 반대로 멋에 극도로 무심한 학생들의 코드는 교련복에 가까웠다. 1980년대 초만 해도 교련은 대학의 필수 과목으로 지정돼 있었고, 문무대는 남자 대학생의 필수 코스였다.


솔 담배

솔 담배
5060 애연가들의 영원한 첫사랑. 1980년 처음 등장한 솔 담배는 출시 당시 450원의 고급 담배였다. 멋과 맛을 아는 젊은 댄디보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1982∼1986년까지 시장점유율은 자그마치 60%. 판매량은 연 20억 갑 이상이었다고 한다. 이후 1990년대 들어 정부가 저소득층을 위한 저가 담배로 ‘콘셉트’를 수정, 200원으로 가격을 대폭 내렸다. 결국 채산성 악화로 2004년 생산이 중단됐고, 2005년 재고가 모두 소진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타자기

타자기
사무혁명의 대표주자로 손꼽히던 타자기. 한글 타자기가 출시된 것은 1950년의 일이다. ‘공병우 타자기’가 그 시초. 이후 경방공업주식회사가 ‘클로버 타자기’를, 동아정공이 ‘마라톤 타자기’를 각각 선보였다. 1980년대 대학생에게 타자기는 지금의 컴퓨터만큼이나 친한 친구. 리포트를 비롯한 중요한 문서를 작성할 때는 늘 타자기 앞에 앉았다. 하지만 타자기도 이제 멸종 위기에 처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타자기를 생산하던 인도 뭄바이의 ‘고드레지 앤드 보이스’ 회사마저 2011년 문을 닫았다.


도나 서머

도나 서머
1970~80년대를 호령한 디스코의 여왕 도나 서머. 1974년 데뷔해 198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우리에겐 ‘Hot Stuff’나 ‘Last Dance’ 같은 곡들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80년 발매한 앨범 ‘더 원더러(‘The Wanderer)’ 역시 그녀의 여러 히트작 중 하나. 2008년 마지막 앨범을 발매했으며, 지난해 6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미국에 도나 서머가 있었다면 우리나라에는 나미가 있었다. ‘빙글빙글’의 그녀는 56세의 나이로 지난달 새 앨범을 내놨다. 여전히 건재한 디스코 여전사의 위엄.


컬러 텔레비전

컬러 텔레비전
1980년 12월 일어난 문화혁명. 바로 컬러 텔레비전 시대가 열렸다. 컬러 텔레비전이 등장하면서 세상은 송두리째 변화하기 시작한다. 화장품이나 옷, 하다못해 본연의 피부 톤까지 모든 것은 ‘색깔의 지배’를 받게 된다. 여성들이 기존에 모르던 다양한 색깔의 립스틱이나 스타킹에 눈길을 준 것도 이때부터라고. 라디오 드라마는 점차 쇠퇴한 반면 텔레비전 드라마는 보다 많은 시청자를 끌어모았다. 당시 대표적인 드라마는 ‘전원일기’. 1980년 10월 방송을 시작해 2002년 12월 막을 내렸다. 1980년 시판을 시작한 금성사(현 LG전자)의 컬러 텔레비전은 그해가 채 끝나기 전에 100만 대 판매 기록을 세웠다.


INTERVIEW

“그 시절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김강현 LIG손해보험 상무(강북본부장)·연세대 생화학과 80학번

김강현(53) 상무의 1980년은 ‘시위’와 ‘휴교령’, ‘학보사’ 등의 키워드로 각인돼 있다. 시대의 암울한 분위기와 그 속에서 피워낸 새내기 대학생의 순수, 열정이 공존했다.
10·26사태와 12·12 군사반란을 겪은 이듬해인 1980년, 스무 살의 시작은 여지없이 어두웠다. 대학에 입학한 지 불과 한 달여 후 계엄령과 휴교령이 잇따라 내려졌다. “한동안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그때는 주로 과제를 핑계로 친구들과 만나 종로 술집이나 찻집을 어슬렁거렸다.” 그의 단골집은 YMCA 맞은편 뒷골목에 있던 OB 직영 맥주집. 물론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김강현 LIG손해보험 상무
이 시기 성행한 과외 아르바이트도 그의 일과 중 하나였다(과외 금지 조치가 내려진 것은 몇 달 후인 1980년 7월의 일이다). 3~4개의 과외로 제법 용돈을 벌었던 기억이 그에겐 있다. 학교 출입은 철저히 통제되었다. “한번은 재학증명서를 떼러 학교에 간 적이 있다. 까다로운 신분 확인을 거쳐 겨우 들어간 학교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적막한 교정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학보사 생활에 ‘올인’

9월이 되어서야 휴교령이 해제됐다. 그때 김 상무의 발길은 교내 학보사 ‘연세춘추’로 향했다.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었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알고 싶었고…. 무엇보다 친형이 당시 학보사 일을 워낙 열심히 했던 터라 그 영향을 받은 것 같다.”
1980년대만 해도 대학신문은 하나의 ‘메신저’로 기능했다. 타 대학 친구끼리 학보를 매개로 소식을 주고받는 낭만적인 풍습(?)이 있었던 것. “이성 친구에게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학보 사이에 편지나 쪽지를 끼워 보내는 것이다. 간혹 발신인 주소가 불명확해 누군가 보낸 학보가 학보사 사무실로 반송돼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 속에는 물론 미처 전해지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의 편지가 접혀 있기도 했다.”

학보사 생활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날마다 출근도장을 찍어야 했을뿐더러 기사 마감 시간이 정해져 있었으니. 수업이 끝나면 김 상무는 늘 학보사로 달려갔다. 기사를 쓰고 교정·교열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야말로 학보사에 모든 것을 ‘올인’했다. 대학 시절에 대한 그의 추억은 팔할이 학보사와 관련된 것이다. 치열하게 매달렸던 만큼 기억에 남는 일도 많다.

“조판을 하는 금요일이면 먼저 시청에 있는 계엄사 사무소로 가 기사 내용을 검열받아야 했다. 정치적 문제를 아무리 우회적으로 표현해도 검열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검열에 대한 항의 표시로 일부 기사를 덜어내고 일부러 백지 상태로 신문을 낸 적도 있다. 그마저도 금지됐을 땐 현장에서 바로 원고지에 새 기사를 썼다.

그러니 금요일 아침 일찍 나가서는 밤을 새고 들어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더욱이 1980년은 아직 통행금지 시절이 아닌가(1945년부터 37년간 계속된 야간 통행금지 조치는 1982년 해제됐다). 학보사 작업이 길어지거나 혹은 동기들과 어울려 술을 마실 때면 외박이 잦았다. 교정의 잔디밭에 누워 밤을 지샌 적도 많다. “길게는 4~5일간 연이어 집에 들어가지 못한 적도 있다”며 웃는 김 상무. “왜 그랬는지 그 시절엔 술만 먹으면 그렇게들 많이 울었다.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겠지만, 가슴속 쌓인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만한 곳이 우리에겐 없었던 것 같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김 상무는 3학년 때까지 학보사 활동에 매진한다(그는 결국 편집국장까지 해냈다). “당시 대학생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자기 공부에 열중하거나 시위 같은 사회활동에 나서거나…. 나는 후자에 조금 더 가까웠던 셈이다.”

자연히 학과 공부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지만 김 상무는 당시를 “내 삶의 좌표를 만들어준 시기”로 정의한다. 사회적 현상을 다각도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학보사 활동을 통해 얻었다는 것.

“대학 시절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문구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교훈(校訓)이다. 당시 우리는 시대의 진리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진실, 진리만이 우리의 길을 바로잡아줄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변함없는 듯하다.”

재미있는 것은 학과 공부를 거의 하지 못했다는 그가 학보사 활동을 ‘경력’ 삼아 졸업 후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는 사실. 1985년 LIG손해보험의 홍보 업무로 사회 첫발을 내딛었다. 물론 어떤 이유에서인지 6개월 후 곧장 다른 부서로 옮기게 됐지만.
“다시 대학 시절로 돌아간다면 학과 공부를 좀 열심히 해보고 싶다. 당시 유전공학 분야의 전망이 밝다는 말에 선택한 전공이었는데, 조금은 아쉽다. 물론 그래도 학보사 생활은 병행할 것이다. 내 대학 생활, 내가 보낸 1980년의 나날에 대해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자료사진 제공=독수리다방(손영득), 해금강테마박물관, 현대자동차, LG전자

조선일보 조선닷컴

시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