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묘미는 의외성에 있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 정지현 시니어조선 편집장
  • PHOTOGRAPHER 김승완(C.영상미디어)

입력 : 2013.11.27 09:14

THIS MAN | 동반성장연구소 정운찬 이사장

서울대 총장에 국무총리까지 지낸 그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이력이나 행적 등에 관해서는 이미 수차례 기사화되었기에 새로울 것도 없다. 그렇지만 그를 만나고 싶었다. 야구는 곧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말하는 야구광 정운찬,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남자 정운찬’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운이 꽉 찬’ 사주를 타고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운찬. 집안 내 돌림자인 ‘구름 운’에 ‘빛날 찬’을 써서 구름 위에서 찬란히 빛나라는 뜻을 지녔다는데…. 1970년대 미국에서 유학하고 컬럼비아대학에서 조교수까지 지낸 그는 능력 못지않게 운도 따랐던 것 같다. 컬럼비아대학 임용을 위한 이틀간의 심층 면접에서 그에게 물은 것이 ‘야구 좀 아세요?’ 였다니. 면접관은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젊은이가 미국 문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싶어 대표적인 스포츠인 야구 얘기를 꺼냈던 것이다. 그런데 이는 소설가를 꿈꾸며 습작을 하고 있던 사람에게 “글 좀 쓰세요?”라고 묻는 격이었던 것. 초등학교 때 메이저리그 명문 구단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간판 타자인 스탠 뮤지얼이 우리나라를 방문해 야구 경기를 벌인다는 포스터를 보고 동대문운동장에 가서 관람했을 만큼 그는 어려서부터 야구광이었다.

동반성장연구소 정운찬 이사장
“야구는 우리 삶과 무척 닮았다. 시즌 중 100경기 넘게 치르는 프로야구는 시즌 내내 승리와 패배를 오간다. 선수들 역시 추락과 반등을 거듭하며 시즌을 겪어낸다. 오늘 이겼지만 내일 패할 수 있고 오늘 추락했어도 내일 솟아오를 수 있다. 수많은 기쁨과 좌절, 행복과 고통 속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묵묵히 결승전을 향해가는 스포츠가 바로 야구다. 이 오르내림 속에서 전해지는 분명한 메시지는 ‘오늘 이기든 지든 시즌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처럼 말이다.”

9회말 2아웃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지나가던 그를 본 동네 형들이 부족한 인원을 채우려고 ‘야구하자’고 불러들인 것이 야구 입문의 계기였다. 처음 해본 경기에서 그는 플라이볼을 두 개나 잡아내며 뜻밖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야구는 외로움과 답답함을 벗어버리고 남루한 일상에서 탈출하려는 몸부림이었다”는 그의 고백에서 어린 시절 놀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주 양반가에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가 광산 채굴에 가산을 탕진하다시피해서 그가 태어날 당시 집안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처지였다. 그가 초등학교 1학년을 마쳤을 때 부모님은 5남매를 데리고 상경해 동숭동 낙산 자락의 단칸방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이는 마치 ‘9회말 2아웃’의 상황과 흡사하다. 메이저리그 경기 중 9회말 2아웃에 1대8로 지고 있던 팀이 9점을 내며 역전승을 거둔 경기가 있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일가친척 하나 없는 서울행이 더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한편 새로운 기회를 얻을 가능성도 지니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승리를 얻기까지 9회말 경기는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경제 사정이 더욱 나빠졌다. 어머니가 삯바느질도 하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지만 50대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벌이도 시원치 않았다.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워 더 싼 집을 찾고, 그러다 보니 자꾸만 달동네 꼭대기를 향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싸다는 것은 그만큼 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집에 사는 사람이 많다 보니, 하나밖에 없는 화장실을 사용하려고 서는 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걸 피해보려고 6시에 일어나던 것이 이사를 한 번 할 때마다 30분 또는 한 시간씩 앞당겨졌다. 부지런한 생활 습관을 갖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으니, 어쩌면 가난이 가져다준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상급학교 진학조차 막막했던 소년, 야구로 어두운 현실을 감내했던 소년은 결국 인생에서 만루 홈런을 터뜨린다. 그의 부모님이 동숭동에 둥지를 튼 진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교정을 오가며 창문 너머로 흰색 셔츠를 입고 강의하던 교수님을 바라보면서 꿈을 키우게 되었고, 초등학교 친구의 아버지이자 서울대학교 교수였던 이영소 박사를 통해 장학금 후원자 스코필드 박사를 만나게 되었고…. 이렇게 시작된 인연들은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그의 인생을 짜내려갔다.

홈런보다 짜릿한 3루타

“‘밥상에서 손이 닿지 않는 음식은 먹지 않는 것이네’, ‘세 번 이상 청하지 않으면 남의 집 잔치에 가는 것이 아니네’. 어떤 결정을 내리거나 행동할 때 어머니께서 늘 하시던 이 두 말씀을 염두에 두게 된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은행 총재 등 여러 공직을 제안받았는데, 그때도 어머니 말씀이 많이 생각났다. 고사하니까 재차 제안했는데, 세 번까진 안 왔다. 세 번째는 수락하려고 했는데(웃음). 이 말은 농담이고, 그때 51세였는데 학교에 남아 할 일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뜻하지 않게 총장으로 선출되어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어 좋았다.”

총장 재임 시절 ‘대학은 자율을 공기로, 투자를 토양으로 성장하는 것이니 외부에서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신을 펼친 그다. 그러나 그가 인생의 타석에서 홈런만 쳤던 것은 아니다. 파울볼이나 병살타를 친 적도 있었지만 저조한 실적을 낸 경기라고 해서 자책하거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총리직을 수락하고 소신껏 직무를 이행한 것에 대해 후회는 안 한다. 다만 좀 더 준비하고 갔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있다. 당시 정치 용어에 좀 어두웠다. 어떻든 정치 세계를 몰랐다. 그렇지만 국정을 많이 배우고 왔기에 후회는 없다.”

이후 동반성장위원회를 설립해 양극화 해소를 위해 노력해 온 그는 지난해 위원장에서 물러난 뒤 현재 동반성장연구소를 만들어 기존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요즘 그는 서울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강연 요청이 많아 수첩에 적힌 일정이 빡빡하다. 그러나 삶의 버팀목이 되어준 야구는 여전히 그의 곁에서 함께하고 있다. 얼마 전 막을 내린 한국시리즈, 각 구단 감독의 경기 운영 방식에서부터 메이저리그 경기와 선수들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인터뷰를 앞두고 야구 관련 사전 지식을 익혔지만, 평생 야구에 대한 열정을 갖고 지내온 그의 말에 장단을 맞춰 취재를 이어가기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운찬(66) 이사장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애미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프리스턴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컬럼비아대학에서 강의와 연구를 하다 1978년 말 귀국해 모교 강단에 섰다. 2002년 서울대학교 총장에 선출돼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다시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했다. 제40대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며, 현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야구광으로 알려진 그는 최근 <야구예찬>(휴먼큐브)을 발간해 야구에 대한 애정을 유감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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