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1.27 09:14

ESSAY

일요일 늦은 밤. ‘콘서트 7080’의 주제는 가을 낭만이었다. 출연한 어느 가수가 이런 말을 했다. 50대까지는 몰랐는데 60이 넘고 보니 깨닫는 바가 있다고 했다.

나이를 먹는 게 마냥 슬퍼할 일은 아닌 것 같다고. 이젠 나이가 재산 같다는 말도 했다. 가을에 드는 단풍이 봄에 피는 꽃에 전혀 꿀릴 것 없는 법이라고 진행자가 맞장구를 쳤다.

그 말을 듣자니 마음에 호응되는 바가 있었다. 나도 낭만에 대하여 그냥 덤덤히 지나칠 수 없는 나이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텔레비전이 제공하는 심야의 가을 낭만에 마음이 그만 흥건해졌다. 나의 사무실은 인왕산 근처라서 산의 기운을 확연히 감지 할 수 있다. 내일 인왕산의 단풍이나마 뒤늦게 제대로 봐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간 밤의 사 소 한 결심을 좇아 이런저런 심사 를 가지고 월요일 인왕산의 옆구리를 걸었다. 가볍게 산책할 요량으로 오후 4시경 출발했다. 너무 가까운 곳이라 시쁘게 보기도 하겠지만 이곳도 엄연히 산중이다. 벌써 해는 연세대학 뒤편의 안산으로 기울었다. 햇살이 졸아들고 으슬으슬 찬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울퉁불퉁 바위와 굽이굽이 산길. 그 사이로 나무들이 늠름히 자라고 있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맺은 열매를 올해의 재산으로 알고 갈무리하고 있는 것일까.

팥배나무는 아직도 열매가 빨갛다. 붉나무의 소금기 가득한 열매는 흔적도 없어졌다. 덜꿩나무의 가지 끝 에는 빨간 열매가 두둑하다. 작살나무의 보라색 열매가 싱그럽다. 때죽나무의 열매는 공중에 총총하다. 찔레나무의 빨간 열매가 텃새를 유혹한다. 산초나무의 까만 열매는 떨어질락말락. 쥐똥나무는 쥐똥 같은 까만 열매가 겨우 하나 대롱대롱. 금슬 좋은 부부처럼 포개지고 있는 자귀나무의 잎들. 소나무는 여전히 여전했다. 모두들 각자의 재산을 악착같이 붙들고 있지만 때가 오면 ‘하나의 밀알’로 떨어져 썩게 할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약수터 지나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운동기구가 구비된 곳을 지났다. 금강산의 한 절경을 빌려온 듯 만물상바위를 지나자마자 눈에 척 걸려드는 것은 이 산책로에서 가장 근사한 풍경! 나뭇잎 사이로 붉은 출렁다리가 나타났다. 까마득하지는 않더라도 제법 아찔한 다리다. 함께 간 친구가 이야기 하길, 바로 이곳의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주위에 보여주면 모두들 설악산이냐고 묻는다고 했다. 서울 도심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풍경이지만 멀리 큰 산에 가서 웬만큼 땀을 흘리고 난 뒤에라야 맞이할 수 있는 경치와 맞먹는 셈이다. 이 번잡한 서울에서 단 몇 분 만에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니! 알싸한 기운에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출렁다리를 건넜다. 인왕산을 벗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눈길을 붙드는 것은 꽃향유였다. 꽃향유는 스러져가는 가을빛을 쓸어 담으며 그 허다한 야생화 중에서도 가장 오래 피어 있다. 이렇게 가장 늦은 시간까지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꽃향유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작은 실마리라도 되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꽃이 한 면으로만 달려 있다는 점이다. 우리 이목구비가 얼굴 한쪽에 몰려 있고 뒤통수는 밋밋한 것과 유사한 구조다.

꽃향유는 얼굴에 해당하는 부위에만 자잘한 꽃이 집중되고 뒷면은 그냥 시 무룩한 표정처럼 우툴두툴 한 돌기만 있다. 혹 사방 전부를 보겠 다고 욕심부리지 않고 절반만 꽃을 달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짧은 산책, 아니 근사한 산행이 끝났다. 드디어 대궐 같은 집들이 있고 문패 없는 대문이 보이고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청운초등학교 담벼락을 따라 난 길이다. 그 길은 왕복 4차선 대로와 연결된다. 그 길 끝에 작은 중국집이 있다 . 길 모퉁이 중국식당. 이 근방에서는 맛으로 유명한 식당이다. 하루치 식재료를 장만해놓고 다 팔리면 더 이상 손 님을 받지 않는다. 겨우 자리를 잡으면 주문과 동시에 돈을 먼저 내야 한다 . 나에겐 짜장의 면발 보다 짬뽕의 국물로 더 감겨드는 집. 산에 갔다 가느라 늘 늦는 탓에 이마가 썰렁해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오늘 지나치며 흘끗 보니 주방장은 손님 떠난 식탁에서 신문을 읽고 있다. 분주하게 점심때를 보냈으니 이제 여유 있게 저녁을 기다리는 중인 모양이었다.

짜장면 냄새를 찾아서 온 것일까. 중국집 정문 돌계단 앞에 꼬마가 앉아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청운초등학교 학생으로 짐작되는 아이는 노란 은행잎을 들고 장난치고 있었다. 옆구리에 가방을 둘러멘 품새가 학원 가다 말고 중국집 주방장처럼 잠깐의 여유를 만끽하는 듯했다. 그때였다. 노란 은행나무 아래 자하문 쪽을 배경으로 노인 한 분이 천천히 걸어오는 게 보였다. 하얗게 서리 내린 머리와 단풍잎 같은 얼굴. 중국식당 앞에서 꼬마와 노인이 엇갈리는 모양새가 어쩐지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에 촉발되어 몇몇 시 구절이 떠올랐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라는 말이 있었지. 소년이로학난성 일촌광음불가경(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이라는 말도 있었지. 궁둥이를 들썩거리며 혼자서도 잘 노 는 꼬마 곁을 스치며 꼿꼿하게 걸어가는 노인을 바라보면서 오늘은 이런 생각을 덧붙이기로 했다. 아이가 봄에 피는 꽃이라면 노인은 이 가을에 물든 단풍이겠다!


글쓴이 이갑수는 1959년 부산에서 태어나 거창에서 자랐다. 서울대학교 식물학과를 졸업했다. 여러 우회로를 거쳐 서른 즈음에 출판계에 입문하여 민음사와 사이언스북스에서 일했다. 1990년 <세계의 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 15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1999년 궁리출판을 세웠고 지금까지 대표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신인왕제색도>, <인왕산일기>, <오십의 발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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