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완의 '마음 가는 대로'] 우리들 이야기… 한국 근현대 회화 100選을 보러 갔다

대한문. 덕수궁 궐문을 지나 미술관으로 가는 길엔 낙엽이 양탄자처럼 깔려 있었다. 미술관 입구의 석주와 계단은 겨울 햇살을 받아 상아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지호의 '남향집'을 비추는 그 햇살 같았다.

4관까지 있는 전시실 중에 1관에서 처음 맞닥뜨린 그림은 안상철의 '잔설'이었다. 하염없이 그림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지붕 위로 올라갔다. 기왓장이 깨질까 봐 조심스레 발을 옮기니 지붕이 이어져 있는 옆집에서 두런두런 새어나오는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맞는다. 우리가 그렇게 살았지…. 이웃과 이웃이 처마를 맞대고 어깨를 맞대고 이야기를 맞대고 가슴을 맞대고 살았지….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나니 눈구덩이 속이었지만 따뜻하기만 했다.

'잔설'에는 눈만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전시회 제목이 '명화(名畵)를 만나다'지만 이 그림들이 태어날 때부터 명화였을까? 이 질문이 입구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명화는 자신을 그린 화가의 숙명을 삼키고 태어나는 것만 같았다. 명화의 DNA도 이기적이다. 명화는 시대를 뚫고 태어난다. 화가의 가난이나 병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태어나고 싶은 그 색깔로 그 붓놀림으로 행태를 갖추기도 하고 때로는 형체도 없이 솟아나 저렇게 무표정한 방관자처럼 벽에 걸리는 것이다.

발걸음이 옮겨지고 몇 개의 그림이 흘러갔지만 나는 아직 '잔설'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잃어버린 게 있는 것 같았다. 저 시대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게 무엇인가? 우리가 수십년을 애써서 물리친 가난에 딸려가 함께 사라진 낭만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림이 한 점 두 점 지나갈 때마다 상실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들이 그림들 속에는 보석처럼 박혀 있었다. 가족, 그리움, 기다림 이웃 꿈과 희망 무엇보다 인내가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아이들이 한구석에 몰려 있었다. 그림 해설을 하는 안내원이 아이들한테 얘길 했다. "요즘에는 유학을 많이들 가지만 옛날엔 가난해서 갈 수가 없었어요. 근데 이 그림을 그린 배운성은 유학을 했어요. 가난했는데 어떻게 가게 됐느냐면요. 주인집 아드님이 유학을 갈 때 머슴처럼 데리고 갔어요. 그렇게 외국에 가게 됐는데 거기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금의환향한 거예요. 금의환향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앞에 앉아 있던 어린아이가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돈 많이 벌어오는 거요." 전시실은 아이들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저 어린 가슴 어디엔가도 이기적인 명화가 숨어 있어서 언젠가는 우리 시대의 고통·불편·탐욕과 불화를 이겨내고 뚫고 나오겠지 하고 기도하며 자리를 옮겼다.

명화가 화가를 잡아먹고 세상으로 나온다고 생각하니 화가의 생몰연도에 더 눈이 갔다. 이 그림은 얼마나 차가운 아틀리에에서 나왔을까? 혹시 이 화가의 아내는 약보다 물감을 먼저 사오라는 서방님이 야속하지는 않았을까? 벽에 걸려 있는 명화들이 무섭게 느껴졌다. 코너를 돌아가니 낭하를 지나갈 수도 없게 관객이 몰려 있었다. 이중섭. 작은 그림 몇 점 걸려 있는 게 전부였지만 관객들이 뿜어내는 경외감과 어둠침침한 조명이 어우러져 한구석에 주황과 먹빛의 황소가 놀라서 멈춰 서 있는 풍경 같았다. 안내원이 어린이에게 미술 수업을 진행하듯이 질문을 했다. "이 황소가 어떻게 보이나요?" 어떤 어린이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멍청하게 보여요." "네? 뭐라고요?" "멍청하게 보인다고요." "아니에요, 잘 보세요. 강인하고 끈기 있게 보이죠?" "네, 맞아요 그렇게 보여요…." 둘러앉은 아이들이 맞장구를 쳤다. 그들의 목소리 사이로 조그맣지만 또렷한 소리가 들렸다. "멍청해 보이는데" 명화가 자라고 있었다. 전시관 내내 나를 따라다니던 상실감이 어린이의 말 한마디로 가득 채워졌다. 전시회를 다 둘러보고 내려오는 돌계단이 물렁거렸다. 나는 춤을 추고 있었다. 등 뒤에선 운보 김기창의 '아악의 리듬'이 소리 없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