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마지막 '베르테르'

국내 뮤지컬 최초의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대중을 상대로 한 모금)은 그로 인해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2년 배우 엄기준이 주연을 맡으며 열성팬이 생기기 시작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황무지였던 창작 뮤지컬 시장의 단비였다. 그러나 인지도가 낮은 창작 뮤지컬에 선뜻 나서는 투자사가 없어 이듬해 재공연을 포기할 위기에 몰렸다. 작품을 살린 것은 팬들이었다. 앞다퉈 돈을 보태고 독지가의 후원을 끌어왔다. 십시일반 모인 돈이 1억원이었다. 어렵사리 성사된 2003년 재공연의 '엄베르'는 '레전드(legend·전설)'라는 평을 남겼다. '엄베르'가 2006년에 이어 7년 만에 돌아오는 뮤지컬 '베르테르'는 '전설의 귀환'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엄기준은 "이번이 저의 마지막 베르테르"라며 "영화나 방송 제안도 전부 뿌리치고 매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베르테르' 팬들이 '전설'이라고 부른다. 왜 그렇게 '엄베르'를 좋아할까.

"2003년 공연 때 나 자신도 아픈 사랑을 하고 있었다. 베르테르의 절망, 정열, 그리움 등 '잘 안 되는 사랑'이 내 얘기였다. 작품을 하며 가질 수 없을 때 더 불타는 감정이 저절로 표현되는 경험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 느낌이 관객에게 전해졌을까."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사랑을 얻지 못해 자살하는 20대 청년의 무모한 순정을 보여준다. 요즘 시각에서 보면 구닥다리 로맨티시스트(romanticist) 아닌가. 2013년 관객이 왜 이 작품을 봐야 하는가.

"내게 베르테르는 하나의 캐릭터라기보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상징이다. 현실에서는 없는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갈망은 시대를 초월한다. 관객은 무대에서 그 갈망을 풀고 싶어 한다."

기자는 지난 16일 연습실에서 '엄베르'를 지켜봤다. 롯데에게 약혼자 알베르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장면에서 대본의 지문은 '술을 들이켠다, 잔을 집어던진다'고 돼 있다. 하지만 엄기준은 술잔을 잠시 바라보다 힘없이 아래로 떨어뜨렸다. 조용해서 더 뜨겁게 드러나는 연기였다.

―이번이 마지막 베르테르라고 했는데, 가장 고민되는 점은?

"늙어 보이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베르테르를 번갈아 하는 임태경씨는 마흔하나, 나는 서른여덟이다. 소속사에서는 뮤지컬 하겠다면 말린다. 가능한 한 방송에 자주 나가야 대중에게 알려지기 쉬우니까. 그 유혹을 포기할 만큼 베르테르에 욕심이 있었다."

―30대 후반과 40대 초반 배우가 20대의 순정을 잘 보여줄 수 있을까.

"주인공은 20대지만, 그 시절을 회상하는 30대나 40대가 더 절절하게 느낄 내용이니 오히려 나을 수 있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사랑이 뭔지 보여주고 싶다."

―1995년 데뷔했으니, 18년차다. 뮤지컬 배우로서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노래가 부족하다. 춤이야 역대 대니(뮤지컬 '그리스'의 주연) 중에서 '가장 춤 못 춘 3대 대니' 중 한 명이고. 끼는 학교 다닐 때도 없었다. 그래서 연기에 집중한다. 부족하기 때문에 더 노력할 뿐이다."

―노래도 못 하고 춤도 못 추고 끼도 없다면서 어떻게 해왔나? 나이가 더 들면 맡을 역할도 없어질 텐데.

"베르테르를 네 번째 하는데도 매일 조광화 선생님(연출가)께 지적받는다. 그게 내겐 자극이 된다. 연습실에 나올 때마다 이를 악문다. 작품과 함께 성장하는 배우는 어떤 모습인지, 꼭 보여드리겠다."

▷뮤지컬 '베르테르' 12월 3일부터,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1588-06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