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제 세게 쓸 수 없어… 난 발레를 해야 하니까

딩동, 현관문이 열리며 깡마른 신사가 기자를 맞았다. 예순다섯 '현역' 발레리노 이상만이었다. "집이 누추해서…." 2주 전까지도 무균실에 누워 있던 그는 지난 30일 오랜만에 맞는 손님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집 안 청소를 한 모양이었다. 식탁으로 쓰는 작은 탁자에 마주 앉으니 아랫입술의 피멍이 눈에 들어왔다.

대한민국 1세대 발레리노로, 국립발레단 창단 단원이자 주역 무용수이던 그는 5년 전부터 림프암 투병 중이다. 항암 치료로 꽤 나아지는 듯하다 최근에 재발했다. 그 몸으로 이번에 다시 신작 발레 '무상(無常)'을 내놓는다. 직접 출연도 한다. "뜀박질밖에 못 하더라도 무대에서 춤추고 싶어서요."

병세를 알게 된 것은 5년 전. 목에 멍울이 만져졌다. 처음에는 대추 알 크기였는데 어느 날 보니 달걀만 해졌다. "약을 세게 쓰면 암세포는 죽지만 힘이 떨어져 춤을 못 추겠고, 약하게 쓰면 춤은 추겠는데 암세포가 커져서 어찌해야 할지." "그러면 춤을 안 추면 될 것 아닌가요?" 했더니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무대에 서면 내 광채가 보이는 것 같아요. 쓸데없는 환상이겠지요. 그래도."

충북 괴산군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서라벌예대 작곡과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발레 수업을 보고 반해서 입학 한 달 만에 무용과로 전과했다. 한양대에 편입해 1975년 발레리노로는 처음으로 무용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일리노이발레단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겠으니 단원으로 오라는 초청을 받았으나 비행기표를 살 돈이 없었다. 궁리 끝에 홀트아동복지회 입양 도우미가 됐다. 미국인에게 입양되는 아기 2명을 데리고 시카고에 내린 것이 첫 외국행이었다. 미국에서도 통하는 한국적 발레를 보여주고 싶어서 자신의 성(姓)을 딴 리(Lee)발레단을 창단한 것이 1985년. 이후 '무녀도' '메밀꽃 필 무렵' '김삿갓' 등 창작 발레를 꾸준히 만들었다. "유명한 장면만 모아서 갈라 공연하면 돈이야 되겠죠. 그런 토막 공연 하기가 싫었어요. 꼭 전막(全幕)으로, 그것도 창작만 하겠다고 결심하고 1년에 1편씩 했어요." 영구 귀국한 것은 1995년이었다. 발레연구소를 냈지만 한 달 100만원 벌이가 힘들었다. 같이 귀국한 자녀 셋과 아내는 결국 일자리를 찾아 미국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그는 혼자 지낸다. "화려한 서양 발레를 원하는 관객에게 한국 발레를 보여준 게 무리였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굶어가며 춤을 췄어요. 힘들 때는 생각했어요. 이렇게 가다 보면 길이 있겠지."

이번에 공연하는 '무상'은 삼국사기 조신의 꿈이 소재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원하는 창작 발레 지원작에 뽑혀 제작비를 충당했다. 출연 무용수는 30명. 그는 영화로 치면 카메오에 가까운 역할로 나온다. 법당에서 나오는 주인공 승려를 잡으러 쫓아가는 경찰이다. "몸이 이러니 장담을 못 하는 상황이라서요. 혹시 제가 못 서게 되더라도 큰 무리가 없게…." 말끝이 흐려졌다. "난 죽을 때 눈물 안 흘릴 거 같아요. 길이 있으리라 믿으며 걷다 보니, 그게 행복한 길이었네요."

▷발레 '무상' 26~27일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문의 010-3262-4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