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그 앵두나무를 본 지가 10년이 넘었다. 5월이면 아담하게 자란 키로 하늘을 향해 뻗은 팔이 짤막한 귀여운 나무였다. 빼곡히 찬 나뭇가지는 어디를 들여 봐도 나뭇잎이 가느다란 가지를 덮고 있었다. 그 녹색 잎 사이로 난 앵두의 불그스름한 색깔은 하얀 배꽃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빙그레 웃던 산골 아낙네의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가득했다.
앵두나무 뒤편에 있는 7000수가 넘는 계사장에는 이 산골 아낙의 남편이 새벽부터 일어나 닭모이를 한창 주고 있었다. 앵두나무의 겸손함은 그 열매만했다. 아무도 모르게 한가득 채워주는 인심이 넉넉한게 앵두나무의 덕이다. 녹색 나뭇잎 사이에 앵두가 꽃비같이 영롱하게 달렸다. 앵두가 투명만 하다면 그건 꽃에 핀 화염의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새벽 닭소리에 안개가 넓은 배밭에서 밤새 한껏 놀다 물러나면 앵두도 잠 깬 산새 소리와 햇살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기도 했다. 산새는 근처 배밭 주인이 모르게 배서리를 하는 자연의 악동이었다. 근처의 반짝거리며 새를 놀라게 하는 광배지도 산새에게는 소용도 없다. 산새는 과수원에는 간달바였다.
욕심 없는 시골 아낙네가 마치 새까만 눈망울의 딸의 곱고 긴 생머리를 고운 빗으로 훑어 내리듯 앵두나무를 손가락을 쫘악 펴 내리면 앵두알이 아이 머리만한 그릇에 도르륵 꽃구슬처럼 굴러 내려왔다. 해가 다시 지고 다시 뜨는 5월의 또 다른 아침이면 시골 소녀도 엄마를 쫓아 앵두나무 옆에서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쪼옥 펴서 도르륵 도르륵 나뭇가지를 훑으면 금세 앵두가 그릇에 한가득하게 찼다. 순정의 여린 앵두 열매의 촉감을 눈을 감고 떠올리면 엄마의 손가락이 소녀의 손가락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작은 앵두나무 곁의 원앙과 감천 배나무는 늘씬한 미녀같이 쑥쑥 커져갔다. 알콩달콩 수북하게 열매가 피어오른 앵두나무는 작지만 인정이 뚝뚝 흘렀다. 아낙네가 딸의 손을 잡고 행진을 하는 비갠 아침에도 앵두나무는 웃음을 까르륵 까르륵 그릇에 다시 한껏 채웠다.
홍성 용봉산 기슭을 바로 돌아선 곳에 눈 덮인 소나무가 눈이 버거워 할 때 앵두도 자그마한 가지 사이에 눈을 잔뜩 이고는 겨울바람에 술렁였다. 다시 봄이 찾아왔다. 앵두나무 옆 과수원의 배꽃이 피고 졌다. 그 앵두나무에 빨간 열매가 마지막으로 달렸던 그해 여름 어느 비오는 날이었다.
그 산기슭의 아낙네는 암 치료를 위해 가족과 그 집을 비웠고, 그 가족이 떠난 창가에는 화초가 남았고, 그 지붕을 타고 넘던 청설모만 흥이 나게 돌아다녔다. 높고 넓게 지붕을 가리던 호두나무가 지붕을 넓게 드리우고 있었다.
아낙네가 가는 허리로 버티며 세웠던 앵두나무 옆의 키 큰 배나무들도 이제는 기억의 안개 너머로 뿌옇게 사라졌다. 아낙이 딸과 해마다 손가락을 쭉 펴고 훑어 내리던 앵두나무도 이제는 다시 볼 수 가 없게 되었다. 배꽃이 하얗게 향기를 품고, 앵두나무가 곱게 가슴속에 순정을 품었던 때가 눈을 삼매에 잠기듯 내리깔면 가슴속에 곧 잡힐 듯 아련하다.
언젠가 홍성분기점을 나와 덕산의 세심천을 가다 그 집 앞에 잠시 섰다. 아내와 애들과 잠시 그 집을 바라보았다. 멀리 야마(野馬: 아지랑이)가 달려 나오면서 그 산골 아낙과 남편이 그 속에서 마구 손을 흔들며 나오는 듯한 뿌연 모습이 눈앞에 아른 거렸다.
**양계장 옆에 홀로 있던 앵두나무를 따던 때를 추억하며 돌아가신 장모님을 기리며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