商街를 조각하다, 보석처럼

'아파트 공화국'이란 오명(汚名)에 가린 서울의 또 다른 오명. '상가(商街) 공화국'이다. 아파트와 함께 서울의 무미한 풍경을 만든 주범이 대충대충 지은 상가 건물이란 얘기다.

여기, 되레 상가에서 도시 건축의 미래를 찾는 이가 있다. '크링'(대치동) '더힐갤러리'(한남동) 등 개성 있는 상업 건축으로 도시 풍경을 보정해온 건축가 장윤규(49·운생동건축 대표·사진). 그가 최근 새로운 상가 실험 두 개를 마쳤다. 서울 삼성동 '보고재', 서교동 '바이크리페어샵 홍대점'이다. 두 건물을 돌아보며 장윤규의 '상가론'을 들었다.

지하철 7호선 청담역 근처. 평범한 상가 옆으로 거대한 바위를 칼로 깎아낸 듯 귀퉁이를 도려낸 진회색 상가 건물이 눈을 사로잡는다. 비정형 외관 때문에 네 면에서 바라본 모습이 제각각 다르다. 밖에서 층수를 세어 보다 포기했다. 일반 상가는 층마다 규칙적으로 창과 간판이 달려 몇 층인지 쉽게 알 수 있는데, 6층인 이 상가엔 간판이 없고 창문도 불규칙적이라 층 구분이 안 된다.

세 주기 좋은 간단한 구조, 큼지막한 간판, 싸구려 소재…. 기존 상가의 디자인 공식을 뒤집은 건물. 얼마 전 강남구에서 '아름다운 건축물' 대상을 받은 '보고재(寶庫齎)'다. "도심에 조각(彫刻) 하나 세운다는 마음으로 설계했습니다. 마침 건축주가 보석 디자이너(홍수원)라 보석을 커팅한 느낌을 살렸지요."

이 건물은 단순히 외형적으로 기교를 부린 게 아니다. 표피를 변형시킴으로써 새로운 공간을 창출해냈다. 평평한 외벽을 입체적으로 도려내면서 생겨난 자투리 공간이 발코니가 됐다. 푸드 스튜디오로 쓰이는 꼭대기 층은 삼각형으로 도려낸 공간 덕에 세모 담장이 있는 옥상 발코니가 생겼다.

장윤규는 "상가는 주변과의 조화도 중요하지만 그 자체가 예술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상가 건물이 멋진 예술품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오래가는 건축물'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튀는 외관의 상가가 많이 생기면 도시가 더 어지러워지지 않는가"라고 묻자, 그는 "건물의 질(質) 문제"라고 답했다. "엑스포를 한번 봅시다. 각양각색 디자인의 국가관이 들어서 있는데 어지럽단 인상은 안 들어요. 각 나라가 자존심을 걸고 좋은 건축가를 써서 만들기 때문이죠. 양질(良質)의 건축물이 섞여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콘텍스트(context)'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한국 건축의 풍토에 대해서도 그는 비판적이었다. 건축에서 '콘텍스트'란 건축물과 관계있는 역사·문화·지리적 배경을 일컫는다. "유럽같이 역사성이 있는 환경에서 건축의 콘텍스트를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스러워요. 한국에선 참고할 게 없는 매우 열악한 환경에 건물을 지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 콘텍스트에 집착하면 '불량 건축의 악순환'만 낳게 돼요." 특히 상가의 경우, 주변 상가와의 조화를 생각해서 비슷하게 지으면 질 나쁜 건축을 복사하는 꼴이 된다고 했다.

서울 홍익대 정문 옆, 화방이 있던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바이크리페어샵 홍대점' 외관엔 장윤규의 이런 건축 철학이 또렷이 새겨져 있다. 나뭇조각을 붙여 집 여러 채를 쌓아올린 듯한 이미지를 외벽에 표현했다. 20년 넘은 낡은 상가를 패션 브랜드 플래그십 스토어로 바꾸면서 "동화적이면서도 회화적인 이미지를 불어넣기 위해" 생각해낸 아이디어였다. 존재감 없던 평범한 건물이 튀는 이미지를 갈아입고 존재를 알리게 됐다.

장윤규는 "상가 건물을 지을 땐 수동적으로 지금 있는 콘텍스트를 따르기보다 자신이 새로운 콘텍스트를 만들겠다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다"고 했다. 주변의 풍경을 바꾸는 '촉매제'를 만든다는 사명감과 자신감. 장윤규가 말하는 상가 건축의 출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