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스토리] 30년전 美지도교수 지시 거부하고 새 연구방법으로 新물질(초격자 다층박막 물질) 찾아냈다

"지난 1년간 교수님께서 시키신 실험을 열심히 해봤지만 실현 불가능한 아이디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1980년대 초 미국 노스웨스턴대 박사과정 2년차였던 나는 지도교수인 존 힐리어드(Hilliard) 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재료과학 분야의 대가로서 자존심이 대단했다. 그런 권위자에게 일개 대학원생인 내가 '당신이 제시한 이론이 틀렸다'는 발언을 한 것이다. 힐리어드 교수는 정색하며 "자네가 아직 실험에 서툴러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이라며 "연구를 계속하라"고 채근했다.

당시에는 두 종류의 상이한 물질을 ㎚(나노미터=10억분의 1m) 두께로 번갈아 증착(얇게 쌓고 굳히는 공정)해 만든 '초격자 다층박막' 신물질 연구가 부상하고 있었다. 힐리어드 박사는 금속초격자 다층박막을 처음 제안한 그 분야의 선도자였다. 그는 내게 납(Pb)과 비스무트(Bi)로 구성된 초격자 다층박막 신물질을 세계 최초로 제작해 초전도 현상을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실험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실패의 원인을 파악해 보니 상온의 납과 비스무트는 서로 엉켜 원천적으로 초격자 구조가 될 수 없었다. 이 과제를 연구해서는 박사 학위를 받는 게 불가능하다는 확신이 밀려왔다.

'실패'. 당시까지 내 인생에 존재해 본 적이 없었던 단어가 현실로 다가왔다. 인생은 늘 나의 계획대로 이뤄졌다는 자부심도 여지없이 무너졌다. '다른 대학으로 옮겨야 하나' 하는 생각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연구실도 2주간 나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 한구석에 용기가 싹텄다. '내가 여기서 물러나면 다른 대학에서도 성공할 보장이 없다. 여기서 끝까지 해보자'는 오기가 발동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연구실에 나갔다. 나 스스로 박사학위 연구 테마를 찾기로 마음먹고 지금까지 발표된 관련 분야의 논문들을 탐독했다. 마침내 지금껏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초격자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기존 연구는 금속과 금속의 초격자 구조나 반도체와 반도체의 초격자 구조만 제작했는데, 금속과 반도체로 이루어진 초격자 구조를 연구해 보자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당시에는 금속과 반도체는 성격이 상이해 초격자 구조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도전해 보겠다는 의욕이 생겼다. 금속인 비스무트와 반도체인 납텔루라이드(PbTe)의 구조가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해, 두 물질로 초격자 다층박막 구조를 세계 최초로 만들기로 했다. 지도교수는 "불가능하다"고 평가했지만 나는 지도교수 몰래 실험을 강행했다. 긴장 속에 첫 시료를 만들었다. 초격자 구조의 존재 여부를 검증하려고 X선 실험을 했다. 실험에는 단 30분이 걸렸지만, 내게는 마치 영겁의 시간 같았다.

'성공'. 나의 예상이 맞았다. 통념을 깨고 금속-반도체 초격자 구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새로운 지평을 여는 순간이었다. 흥분된 마음으로 지도교수에게 달려갔다. 그는 자신이 시킨 일은 하지 않고 다른 연구를 한 제자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이 실험에서 새롭게 나올 만한 게 있느냐"고 말했다. 나는 담담히 연구 결과를 설명했다. 내 말이 끝나자 힐리어드 교수는 "이제 자네가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해보게"라며 태도를 바꿨다.

남들이 가지 않은 분야의 지평을 넓혀간다는 기쁨과 자긍심에 나는 연일 밤을 새우며 연구에 매진했다. 이제까지 자연에 존재하지 않던 초격자 구조 신물질을 제작한 덕택에 새로운 물성(物性)의 발견은 논문으로 이어졌다. 1년 반 만에 논문 7편을 저명 학술지에 게재할 수 있었고, 박사 학위 과정도 무사히 마쳤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로 가는 새로운 연구에 대한 도전은 과학자로서의 나의 삶에 소중한 지표가 됐다.

1989년 귀국해 KAIST에서 나노자성체 스핀 동력학을 연구하는 소위 나노스핀닉스(Nanospinics)라는 분야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20여년간 논문을 310여편 발표했고 초청 강연을 160여회 했다. 연구에서 깨달은 도전 정신은 현재 DGIST 초대총장으로서 대학을 경영하는 데도 큰 밑거름이 됐다. 기존 대학들이 갖지 못한 그 무엇을 찾아내 바로 실천하는 정책을 경영의 최우선 방침으로 삼았다. 융·복합 전공 체제와 무학과 단일학부 도입, 전 과목 전자교재 개발 등이 그 산물이다.

30여년 전 박사과정 중에 겪은 시련이 없었다면 나는 차별성이 없는 연구만을 수행하는 과학자로 머물렀을 것이다. 세계 초일류 연구 중심 대학이라는 DGIST의 비전도 없었을 것이다. 대학원생 시절 실패를 딛고 나섰던 도전 덕분에 내 인생이 바뀌었다.

[신성철 총장은…  '나노스핀닉스' 분야 개척]

신성철(申成澈·61) DG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 총장은 나노스핀닉스(Nanospinics)라는 분야를 독창적으로 개척한 과학자다. 나노스핀닉스는 나노 세계의 자기장인 스핀을 사용해 전자회로를 구현하는 분야이다.

신 총장은 서울대 응용물리학과와 KAIST에서 각각 학사 학위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는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받았다. 2008년 미국물리학회 석학회원(fellow)으로 선출됐으며, 한국물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2011년부터 DGIST 초대 총장을 맡고 있다. 신 총장은 130여회 대중 과학 강연, TV 과학 프로그램 진행, 언론 칼럼 기고 등으로 과학 대중화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도 대학의 주요 현안을 설명하는 간담회의 프레젠테이션을 직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