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 없이 2시간 20분을 옆 사람과 어깨를 붙이고 봐야 하는 이 소극장 공연은 연극도 뮤지컬도, 그렇다고 콘서트도 아니다. 이야기 전개도 평면적인데, 주말은 물론 평일까지 좌석을 꽉꽉 메우며 인기몰이 중이다. 싱어송라이터 이지형(35)이 직접 각본·연출·주연을 맡은 음악극 '더 홈'(The Home)이다.
군 제대 후 '16년째 데뷔 준비 중'인 무명 가수의 딱하고 때론 구질구질한 일상을 습작 웹툰작가처럼 서툴지만 풋풋하게 그렸다. 극 중간에 서정성 짙은 그의 노래 15곡을 기타·건반·드럼의 담백한 라이브 연주로 들을 수 있다. 피아니스트 이루마와 윤한, 기타리스트 조정치, 유희열 등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무명 가수의 음악 인생을 자신의 노래로 엮어 만든 음악극‘더 홈’공연 중인 가수 이지형. /민트페이퍼 제공
지난 2일 공연이 끝나고 미니 그랜드피아노와 반쪽짜리 드럼세트, 어쿠스틱 기타만 남아있는 무대에서 이지형을 만났다. "노래뿐 아니라 이야기도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스물셋에 록밴드로 데뷔한 뒤 줄곧 붙어다니는 무대 공포증을 없애고 싶었죠. 그 공포증 때문에 늘 기량의 반도 못 보여준다고 생각했거든요."
'더 홈'에서 3인조 인디 밴드를 이끌고 있는 주인공 지형은 "예술가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꽃게 축제' 행사에서 공연하기도 하는 등 왔다 갔다 한다. 기타를 배우러 온 여성에게 추근대고, 오선지에 선율을 구상하다가 컴퓨터 '야동'에 몰입하기도 한다. 밴드의 앞날이 갑갑한 상황에서 오디션 프로에 나갈지를 두고 멤버들과 티격태격하지만 "난 (허각이나 울랄라세션 같은) 드라마가 없다"며 푸념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는 "지어낸 얘기"라고 말했지만 많은 이는 극 중 지형에게서 실제의 이지형을 떠올린다. 2001년 록밴드 '위퍼'로 데뷔한 그가 2007년 토이의 '뜨거운 안녕'을 부르지 않았거나 올봄 TV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에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를 아는 이는 지금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어릴 때 같이 음악 하던 형들은 로커가 TV에 나오면 변절자 취급했어요. 그들과 같은 생각이던 지형이 오디션 프로에 나갈지는 열린 결말로 놔뒀어요. 자기 틀에 갇혀있던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는 게 중요하죠."
내년 초 어쿠스틱 소품집을 낼 예정인 그는 "1등에 대한 강박이 없는 것, 음악을 계속 놓지 않는 것. 이 두 가지만으로도 난 이룬 게 많다"고 했다. 공연은 8일까지 서울 대학로 선돌극장.
[라바·케로로만 아신다면 서운합니다]
보이는 라디오 드라마 '성우쇼' 캐릭터 뒤에 숨은 연기력 방출
“그 손 놓으시오.” 첫마디 들었을 뿐인데, 귀를 의심했다. 분명히 만화영화 ‘슬램덩크’의 서태웅 목소리였다. ‘원피스’의 해적 조로 목소리이기도 했다.
3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녹음실에서 성우 김승준(46)씨가 대사를 읊었다. TV 영화에서 많이 듣던 여주인공 목소리도 들렸다. “안 돼, 도망쳐.” 성우 소연(40)씨였다. 7일 서울 압구정 예홀에서 열리는 ‘김승준의 성우쇼’ 주인공들이다.
'김승준의 성우쇼'에 출연하는 8명의 성우.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홍범기, 소연, 김승준, 위훈, 양정화, 사문영, 이보희, 백승철 성우. /김지호 객원기자
‘성우쇼’는 캐릭터 뒤에 가려 좀처럼 빛 볼일 없는 성우들을 무대에 내세운다. 성우가 무대 위에서 목소리로 연기하는 ‘보이는 라디오 드라마’인 셈. 지난 8월 부산에서 처음 무대를 열었고 서울에선 처음이다. 성우 경력 23년인 김씨가 후배 7명과 뜻을 모았다. “분명히 우리도 연기자이지만 영화나 만화 캐릭터를 빼면 스스로를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넘치는 끼를 직접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부산 공연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김씨는 사비 2000만원을 들여 장비와 인력을 보강했다. 김씨는 “아내가 일 자꾸 벌이지 말라고 했지만, 성우들의 무대를 넓힐 변곡점이기에 꼭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며 웃었다. 이번 공연은 1000년 전 정인(情人)을 졸지에 잃은 남자가 현재로 시간 이동을 하고, 환생한 그녀와 사랑을 이룬다는 드라마. 목소리 연기는 물론 효과음도 성우들이 무대 위에서 직접 만들어낸다. 성우 용어로 ‘폴리 아티스트’를 자처한 성우들은 카세트테이프 필름 뭉치를 밟아 낙엽 밟는 소리를 내고, 칼을 뽑는 대목에선 고철을 흙손으로 그어 소리를 만든다. 애니메이션 ‘라바’의 벌레 목소리로 유명한 홍범기(39)씨는 “라디오 부스를 무대에 통째로 옮겨놓은 셈”이라고 했다. ‘개구리 중사 케로로’의 양정화(43)씨가 거들었다. “CD로 오디오 드라마를 즐겨 듣는 분들은 현장감 때문인지 ‘NG 모음’ 같은 트랙을 특히 좋아하시더라고요.”
성우들의 가창력은 또 다른 재미다. 극 중간중간 맑은 고음으로 읊조리듯 노래하는 사문영(33)씨는 성악을 전공한 팝페라 가수 출신이다. 이보희(27)씨는 ‘유희왕 제알’ 등의 만화영화 주제곡을 직접 불렀고, 위훈(40)·백승철(40)씨는 뮤지컬배우를 겸하고 있다. 김승준씨가 말했다. “감동으로 온몸을 주체할 수 없게 해 드려야죠. 공연 끝나고 앰뷸런스 딱 두 대만 왔으면 좋겠어요.” 박장대소가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