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죽회' 회원이신가요?

“수수료 붙나요?” 창구를 통해 은행 일을 볼 때 앞의 직원에게 물어보곤 하는 질문이다.

“얼마 전 조사한 거라는데요, 현금 1억 원이 생겨도 지불하기 아까운 돈 1위가 바로 은행수수료라네요. 저야 ‘억’과는 거리가 한참 멀지만, 생겨난 돈이 아니라 맡긴 돈 찾는 거니 수수료가 더 아까울 수밖에요. 해서 더 당당하게 묻게 되네요. 전에는 얼마나 된다고 그러나? 할까 봐 묻기에 좀 머쓱한 적도 있었거든요.”

사실은 여직 머쓱한 게 맞다. 그러니 묻지도 않은 말을 몇 자락 보태고 있는 것 일게다.

“그럼요, 적은 돈부터 아끼시는 부자 고객분들을 종종 대하게 되는데요, 어떤 할아버지 고객도 그런 분이셨어요. 버스비도 아까워 웬만하면 걸어 다닌다고 하셨지요. 그렇게 살뜰히 모아 저희 은행으로선 큰 고객이셨는데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그런 후 자식들끼리 서로 소송까지 하면서 재산 싸움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어요. 참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업무처리를 능수능란하게 하면서도 고객 편을 드는 듯한 얘기까지 곁들이는 직원이다. 가슴에 괜히 과장 명찰을 달고 있는 건 아닌가 보았다. 창구 일이 일찍 끝났기에 망정이지 그 은행의 자산관리 서비스에 대한 소개까지 이어질 눈치였다. 요즘은 자산관리 정도가 아니다. 점점 노년층이 두터워지면서 가문관리 서비스까지 등장하고 있다지 않은가. 단순히 세금을 최소화하여 유산을 물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평생 일궈온 사업체를 어떻게 잘 넘길 지까지 관리해준다고 들었다. 은행마다 ‘VVIP’로 모시는 국내 상위 0.1%의 수백억대 ‘수퍼 리치’들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다. 그런 초 부유층은 아니지만, 웬만큼 부를 갖춘 노년층의 경우도 어떻게 하면 돈을 잘 쓰고 이 세상을 떠나느냐는 숙제를 안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경제력 있는 ‘골드 시니어’의 또 다른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자식과 재산과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자조적인 운율로 버무려져 마치 삼행시나 사행시인 듯한 어구들이 어르신들의 입에서 입으로 돌고 있는 연유이기도 하다. ‘재산 안주면 맞아 죽고, 반주면 졸려 죽고, 다 주면 굶어 죽는다’나, ‘출가시킨 후 아들은 큰 도둑, 며느리는 좀도둑, 손자들은 떼강도’, ‘빚진 아들은 내 아들, 잘난 아들은 나라의 아들, 돈 잘 버는 아들은 사돈의 아들’이란다. 이런 말끝에는 대개 다음과 같은 결의가 등장하기에 십상이다. “죽을 때까지 돈을 쥐고 있어야 해. 안 그러면 자식들한테 무시당하고 서럽기 짝이 없어지는 거지.”,“다 쓰고 죽어야 해. 그래야 나중에 유산을 놓고 자식들 간에 분란이 일어나지 않지.” 그래서 ‘쓰죽회’를 만들기로 했노라며 농담반 진담반 말씀하시는 어르신도 뵈었다. ‘다 쓰고 죽자’회라 하여 ‘쓰죽회’다. 젊은 시절 고생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녀들 다 키워 출가시켰으니 이제 나를 위해 써야겠다는 얘기다. 가정뿐 아니라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인생을 다 바쳤으니 과연 그럴 자격이 차고도 넘치는 분들이다.

이런 골드 시니어들을 대상으로 한 종로와 강남의 괜찮은 뷔페 음식점들은 예약 없이 자리 잡기가 힘들 정도라고 한다. 일반 소비시장에서는 물론이고 인터넷 쇼핑몰에서까지 문화며 건강, 레포츠 상품들에 대한 ‘그레이 파워’가 날로 도드라져 가고 있다. 이미 일본은 저출산으로 위축됐던 소비산업의 활력을 노인 소비에서 찾았다고 한다. 우리도 60대 이상이 전 인구의 15%를 넘어섰고, 본격적인 ‘100세 시대’가 머잖은 이제, 그레이 파워를 붙잡으려는 마케팅들이 활발하다. 그럼에도 통하지 않는 어르신들도 많다. 평생 근검절약하고 살아온 가락을 버릴 수 없어서, 손 내미는 자식들을 아예 외면할 수 없어서인 까닭들이다. 자식들이 홀로서기에는 우리 사회구조가 여전히 녹록지 않음을 아는데 가진 돈이 있는 한 어찌 모른 체하기가 쉬울 손가. 그래서 자기다짐이라도 할 요량으로 다 쓰고 죽자는 ‘쓰죽회’가 입에 오르내리게 된 건 아닐까.

나와 내 자식이 아니라 남을 위해 다 쓰고 죽자는 분들도 있기는 하다. 작년이었던가, 어느 신문에 실렸던 ‘염소 할머니’ 같은 분이 바로 그렇다. 80세 가깝도록 평생 염소 팔아 모은 돈 1억 원을 고등학교 장학금으로 내놓은 할머니에게 당시 대통령이 감동의 편지를 보냈다고도 한다. “1억 원 외에 조금 있는 돈, 그것도 다 내놓으려 했지… 그런데 아프면 어떻게 할 거냐는 거야. 할 수 없어 병원비만 남겨놨어….” 그래도 남긴 게 걸렸는지 할머니는 ‘죽기 전 조금이라도 여유가 되면 어린 학생들을 위해 가진 것 다 내놓고 갈 생각’이라고 했단다. 이처럼 감동을 주는 ‘다 쓰고 죽자’는 그러나 드문 이야기. 오히려 쓸 것이 없어 ‘황혼 자살’이 늘어나고 있는 마당이니 안타깝기만 하다.

60세 이상 노인의 빈부격차가 심화하면서 불과 10년 사이 2배가 훨씬 넘는 자살률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지 않은가. 이미 우리나라는 노인 절반이 ‘빈곤노인’으로 세계 최악의 노인빈곤국군(群)에 속해 있다고 한다. 그 어려움이 매년 더 악화하고 있는데다 특히 고령층에 집중되고 있다니 문제다. 그나마 출근길 지하철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읽고 버린 신문지를 수거하는 노인들은 나은 편인 건가. 자리를 양보해 드려도 시원찮아 뵈는 할아버지 한 분께 여쭈니 온종일 신문을 주워도 하루 5~6천 원 벌이가 힘들다고 하셨다. 한 달에 10만 원 벌이가 어려운 형편이다. 자식들에겐 바랄 수도 없는데 신문을 거둘만한 힘조차 사라지면 어떻게 되나. ‘다 쓰고 죽자’와는 정반대 상황 속에서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 되는 건 아닐까.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 건 옛말이다. 이제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런 노인들이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시대가 됐다. 문제는 그 재원이다. 이를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하더라도 바라건대, 빼앗기듯이 아니라 기꺼이 수긍하고 십시일반 할 수 있게끔 하는 정책, 어디 없을까. 또 한 가지, 염소 할머니 같은 쓰죽회 회원 될 분들, 어디 없을까. 누구나 뜻만 있으면 가입 가능하며 회비는 마음 가는 대로, 형편 닿는 대로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