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이 간다] 사퇴 이유가 의리 때문? 깨끗하게 물러선 것뿐

난생처음 '실업자'가 된 정명원(47·전 두산 1군 투수코치)을 만나러 가는 길, 전철 창문 너머 낙조(落照)가 유달리 붉었다. 지는 해처럼 사람도 물러날 때 모습이 세상의 뇌리에 남는다. 그는 "이제 명함도 없다"며 웃었다.

이 계절, 스포츠계의 관심은 누가 추풍낙엽같은 신세가 되느냐다.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에 3승4패로 진 뒤 해임된 김진욱 전 두산 감독이 화제가 됐다. 팬들은 '선전했다'고 생각했지만 구단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뒤를 재일 동포 송일수 감독이 이어 파문이 끝나는 듯했는데 돌연 정명원 1군 투수코치가 자진사퇴했다. 그가 내놓은 사퇴의 변(辯)은 이런 것이었다. "책임은 나눠 져야 한다. (김 감독) 혼자 짐을 짊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자리에 체면을 던지는 시대다. 뻔뻔한 세상에 스스로 자리를 박찬 소식이 궁금증을 일으켰다. 얘기는 이어진다. 두산 투수들이 '잘린 코치'를 부모 잃은 듯한다는 것이다. 뜻밖에 '정명원 유탄'을 맞은 이는 선동열 KIA 감독이다.

올 시즌 우승 후보에서 최하위권으로 전락한 뒤 코치진은 쑥밭이 됐는데 살아남은 선 감독과 정명원을 비교하는 논쟁이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대체 죽어서 살아난 이 낯선 리더십의 정체는 무엇인가. 오늘 주제는 이것이다.

"11월 27일 일본 전지훈련 중 김 감독 경질 소식을 들었습니다. 모두 다 놀랐죠." 정명원은 28일 물러나겠다는 뜻을 굳혔다. "아내가 펄쩍 뛰었습니다. 큰아이가 올해 수능 봤고 둘째는 고교생인 데다 막내는 초등학생이니까요."

12월 1일 신임 송일수 감독과의 상견례때 송 감독은 물론 구단도 깜짝 놀라는 일이 벌어졌다. "계속 일해달라"는 신임 표시에 "그만두겠다"며 사의를 표한 것이다. 구단은 "며칠 더 생각해보라"고 했지만 그의 뜻을 꺾지 못했다.

정명원은 김진욱과 2년 전 두산에서 만날 때까지 별 인연이 없다. 김 전 감독은 두산의 전신 OB의 터줏대감이었고 정명원은 태평양-현대유니콘스에서 한국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명성을 얻은 뒤 현대-넥센에서 투수코치로 일해왔다.

"의리(義理) 때문은 아니고…. 명분(名分)이랄까, 새 감독이 오면 새 사람을 써야죠. 김 전 감독이 놀랐는지 연락을 해왔지만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했어요. 다만 아쉬운 것은 다 잡았던 한국시리즈 우승을 놓친 것이죠."

'깨끗하게 물러서는 것', 이것을 그는 13번 목이 잘린 야신(野神) 김성근 고양원더스 감독에게서 배웠다. "원광대를 졸업하고 농협에서 촉탁으로 일하던 절 프로야구로 불러주신 게 김 감독입니다. 중간에서 김경문 감독(NC 다이노스)의 추천을 받아들이신 거죠. 혼도 많이 났지만 많이 배웠습니다. 남자다운 것, 그분이 제 사표(師表)죠."

두산이 김 전 감독 해임 사유로 내세운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투수 기용'이다. 한국시리즈 같은 단판 승부에선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야 하는데 김 전 감독은 페넌트레이스처럼 안이하게 마운드를 운용했다는 것이다. 진실은 무엇일까.

"3승1패 뒤 맞은 5차전이 승부처였어요. 5대5로 동점이던 6회초, 이때가 우리 제1선발인 니퍼트를 넣을 찬스였어요. 전 그렇게 생각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두산은 6차전 때도 기회가 있었다. "2-3으로 지던 6회가 니퍼트를 바꿀 기회였어요. 전 교체를 생각했죠. 그런데 본인도 자신 있어 했고 감독도 '1선발을 조기 강판시키냐'며 아쉬워했고. 결정은 감독이 내리는 거니까요."

반면 삼성은 5-6차전에서도 투수를 총동원해 승부를 되돌린다. 두 차례 승기를 허무하게 놓치는 모습을 본 두산그룹 수뇌부는 분통을 터트렸다고 한다. 아마 두산은 두 경기에서 '김진욱으론 안 된다'고 결심 내린 모양이다.

왜 구단과 선수들은 떠나는 그를 아쉬워할까. "선수 지도도 김성근 감독에게서 배운 바가 큰데…. 프로선수 정도면 못해서 못하는게 아니거든요. 안 해서 못하는 거죠. 지도자는 그걸 깨우쳐주는 자리고요. 힘들지만 자신을 성공으로 이끄는 지도자, 선수들도 나중에는 그걸 압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올해 선발투수로 활약한 노경은이다. 9년간 무명이던 노경은에게 그는 줄곧 이렇게 말했다. "너는 선발감이다. 대성할 수 있다. 그러면서 계속 기회를 준 거죠. 마일영, 장원삼, 이현승이도 그런 케이스고요."

정명원은 선수 시절부터 '열혈남(熱血男)'으로 통했다. 대표적인 게 1996년 현대 시절 삼성과의 경기에서 연달아 빈볼을 던진 것이다. "당시 삼성·현대는 재계 라이벌이었어요. 삼성이 리드를 당하자 연달아 3명에게 빈볼을 던졌습니다. 7-1로 이기던 7회 제가 등판을 자청했죠."

정명원은 양준혁-이승엽을 정통으로 맞혔다. "본때를 보인 겁니다. 맞고만 있을 순 없다고. 8-9번 타자는 불쌍한데 맞힐 수 없고 제일 잘하는 3-4번을 겨냥한 거죠." 결국 싸움이 일어나 정명원은 10게임 출장 정지를 당했다.

반대로 현대 수뇌부는 "현대의 자존심을 세웠다"며 흐뭇해했다고 한다. 출장 정지 기간 금일봉을 하사하고 제주도 여행까지 시켜줬다. 자연스레 선수들은 그를 맏형으로 따르게 됐다. 지도자로서도 선수 시절 근성은 살아 있다.

1억 안 되는 박봉(올해 8300만원)에 이런 리더십을 보이니 정명원의 '실업 기간'은 조만간 끝날 것이다. 벌써 몇 군데서 제의가 왔고 마음을 굳혔다는 곳을 밝혔지만 여기서는 쓰지 않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