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작품은 삶에서 예술적 요소를 빼앗는 모든 아카데믹한 관습으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한다."―스티븐 헬러(뉴욕타임스 비평가)
지난 6일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스페인의 그래픽 디자인 거장 하비에르 마리스칼(63)을 조명한 '현대카드 컬처 프로젝트 13 마리스칼' 전시장에 이런 한 줄 비평이 붙어 있었다.
"젠장!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머리 아파요. 아스피린 먹어야 할 것만 같다니까." 문구 앞에서 한 사내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비평의 대상이자 전시 주인공인 마리스칼이었다. "관…습(conventionalism)? 해…방(emancipation)?" 한 글자 한 글자 읽다 이내 포기한다. 대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이게 나예요, 나!"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괜한 투정이 아니었다. 그는 진짜 심각한 난독증(難讀症)을 겪고 있다. 아이처럼 말보단 몸이, 몸보단 그림이 한 발짝 앞섰다. 그래서인지 마리스칼의 드로잉은 아이가 그린 것처럼 귀엽고 정감 있다. 난독증이란 장애는 이미지로 소통하는 그만의 재주를 더해줬다.
아시아에서 처음 열리는 이번 한국 전시엔 그래픽, 가구, 인테리어 디자인, 영화 등 온갖 장르에 걸쳐 쏟아낸 작품 1200여점이 전시됐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동화책 사이를 산책하는 느낌이다. 알록달록한 대형 알파벳 조형물 사이로 강아지 모양 의자 '훌리앙', 어린이용 장난감 집 '빌라 훌리아', 서울 전시를 위해 특별 제작한 캐릭터 '아트 플레이어' 같은 아기자기한 작품들이 동심을 이끌어낸다.
전시의 목표를 묻자 마리스칼은 두 단어를 몸짓으로 먼저, 그리고 반 박자 뒤 말로 표현했다. 두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위로 길게 올렸다. "스마일(smile)!"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곤 다시 어렵게 한마디 했다. "땀(sweat)!"
"아이들이 전시장에서 맘껏 뛰어놀며 행복하게 웃고 땀을 흘렸으면 해요. 요즘 애들은 노는 걸 몰라요. 내게 놀이는 예술 그 자체예요." 마리스칼은 갑자기 씹고 있던 껌을 뱉어 전시장 한가운데 둔 꽃 모양 설치물 아래 쑤셔 박았다.
"디자인할 때 무작정 그림부터 그리지요. 무수히 많은 그림 속에서 몇 개를 뽑고, 그걸 보고 생각을 정리해요. 뭘 디자인한다 생각해 놓고 억지로 짜내면 머리가 폭발할 거 같으니까." 형제 중 아홉째인 동생 페드린(마리스칼은 9남 2녀 중 셋째)이 큐레이팅한 이번 전시장 입구엔 마리스칼의 스케치 수백 점이 커튼처럼 걸려 있다.
마리스칼의 바람은 실현됐을까. 기자의 여섯 살짜리 딸을 데리고 전시장을 다시 찾았다. 제 또래가 쓱싹 그린 것 같은 밝은 색감의 그림에 빠진 아이 얼굴엔 내내 웃음이 번졌다. 땀은? 글쎄. 관람객이 작품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전시장 직원들이 제지했다. 마리스칼의 말이 맴돌았다. "여기 작품 다 만지고 두드려도 돼요. 그게 살아있는 디자인 전시죠." 문의 (02)325-1077~9.
☞하비에르 마리스칼
스페인 발렌시아 출신의 세계적 그래픽 디자이너. '코비'(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스코트), '트윕시'(2000년 하노버 엑스포 마스코트) 디자인 등으로 명성을 얻었다. 캠퍼(Camper)·H&M 등과 협업했고, 지난해 페르난도 트루에바 감독과 애니메이션 ‘치코와 리타’를 공동 연출해 아카데미상 애니메이션 부문 수상 후보에 오르기도 한 멀티 플레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