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빨간 신호등 앞에서

퇴근길.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건다. 차창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렸다. 가로등 불빛이 아직 밤이 아님을 알리듯 흐릿하다. 가로수 나뭇가지에 말라비틀어져 매달린 나뭇잎 몇 개가 초겨울의 을씨년스러운 초저녁을 말해주고 있다. 거리로 나서자 잔바람이 부는지 나뭇가지에 매달린 색 바래 거무튀튀한 모습으로 힘없이 떨어지더니 보도(步道) 위에 나뒹군다.

노래가 흘러나온다. 전주곡이 흐른다. 처음엔 ‘이게 뭐였지?’ 하다가 이내 김무송의 ‘사는 게 뭔지’라고 알아채는 순간 내 몸의 세포들이 하나둘 잠에서 깨어나 나도 모르게 흥얼댄다. 트로트에 아니 가요를 흥얼거리게 된 게 언제부터일까?

난 노래를 부를 줄 몰랐다. 어려서부터 누가 나에게 노래를 가르쳐 준 적도 없었고 사춘기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를라치면 경박스럽다는 퉁박을 맞기가 일 수였다. 그러니 노래를 노래답게 불러 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음치에 가까운 내 목소리 탓도 한몫했으리라.

직장생활을 하면서 회식 자리엔 늘 노래 부르기가 뒤따랐다. 나에겐 정말 피하고 싶은 자리건만 설상가상이라고 노래방까지 등장을 하고 보니 노래를 안 부르려야 안 부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선 필수가 되어버린 노래. 결국, 노래 배우기에 나섰다.

처음엔 집에서 이것 저것 불러 보았지만 영 내겐 높은 산이었다. 그러다가 노래 못 부르는 음치 대여섯 명이 퇴근 후에 모여 우르르 노래방으로 몰려갔다. 저녁 시간이라 손님도 없는 탓에 마음씨 고운 주인은 한 시간 대여료를 받고는 우리가 지쳐 제 발로 노래방 룸을 나설 때까지 맘껏 부르게 해 주었다. 그렇게 발을 디딘 노래 세계는 나를 그래도 TV나 라디오에서 노래가 나올 때 흥얼거리게 됐으니 장족의 발전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볍고 삶을 노래하는 트로트가 좋다. 예전에야 감히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하는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노래도 하나 제대로 못 부르면서 왠지 그런 노래를 부르면 내 격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괜히 무게 잡고 제대로 부를 줄도 모르면서 팝이니 뭐니 좋다고 불렀지만, 지금은 가벼운 노래가 좋다. 우리의 노래가 좋다. 그만큼 삶의 무게가 무거워져 힘에 겹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친구들도 같은 생각이라 하는 걸 보면 알 수 없는 어떤 무거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때는 이때다 싶어 운전대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노래를 불러 댄다. ‘그럼, 그럼. 사는 게 뭔지 아직 알 순 없지. 암 그렇고말고’ 혼자 주고받고 다 한다. 누가 봤다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손은 운전대를 치다가 내 무릎을 치다가 끝내는 경적을 치고 말았다. 빠앙~ 소리에 내가 치고 내가 화들짝 놀란다. ‘그래 너 거기 있었지. 안다 알아’ 침묵수행하고 있다가 하 어이없어 내지르는 소린가 싶다. 파열음이다. 그 커다란 파열음에 놀랐는지 옆 차선의 자동차 속에서 운전하던 남자가 어이없다고 쳐다본다. 

네가 내 속을 어찌 알랴. 살면서 하고 싶은 얘기가 참 많다. 남편에게도, 다 큰 자식들에게도, 직장 상사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들을 쌓아놓은 것이 이미 태산(泰山)보다 높을 나이다. 그렇다고 그 얘기를 어찌 다 풀어 놓을까?

아직 산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렇게 노래라도 부르며 풀어 놓으면 사는 게 좀 더 가벼워지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살면서 어느 날  침묵수행 중에 깨어나 터져 나올 파열음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