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人生의 전환점] 천년을 버틴 석탑, 영원히 남을 내 모델

양현모(50)는 패션·인물 사진작가다. 애경·코리아나 등 유수 화장품 대기업들의 의뢰를 받아 비(Rain)·이나영·송혜교 등 유명 연예인들 사진을 찍었던 '스타 사진작가'다. 개인 스튜디오인 'IL STUDIO'는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고, 양 작가 본인은 매해 수억 이상을 버는 '거물' 대접을 받았다.

그런 그가 얼마 전 갑자기 "사람 대신 석탑을 찍겠다"고 선언했다. 13일 만난 그가 밝힌 이유는 뜻밖에도 간명했다. "싫증 나더라고요."

패션 작가 시절의 그는 너무나도 바빴다. "광고주·매니저 등의 재촉을 받으며 '빨리빨리' 사진을 뽑아내야 했어요. 사진의 대상을 만지고 보고 느끼고 냄새 맡을 여유가 전혀 없었죠." 패션 사진의 특징도 그를 허탈하게 했다. "광고사진은 한 번 사용되면 곧바로 휴지통에 갑니다. 나이가 들다 보니 그런 사진보다는 영원히 남을 사진을 찍고 싶더군요."

2009년, 양 작가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경주로 훌쩍 여행을 떠났다. 경주 구석구석을 떠돌던 그의 눈에 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감은사지 3층 석탑. "어두워지는 하늘 밑으로 석탑이 보이는데, 절로 '아 멋지다' 소리가 나오더군요. 공터에서 홀로 천 년을 넘게 서서 견딘 탑. 굉장한 에너지가 느껴졌어요."

여행이 끝나고도 감동은 멈추지 않았다. 양 작가는 그날 감은사지에서 본 '석탑 본연의 아름다움'을 찍기로 결심했다. "천성적으로 싫은 일은 절대 못합니다. 모델 찍기에 싫증이 나니, 자연히 열정이 탑으로 가더군요."

새 출발은 쉽지 않았다. 장비 준비만도 1년이 걸렸다. 쇠파이프와 커튼용 천으로 조립식 장막을 만들었다. 시중에 나온 렌즈의 선명도로는 '탑의 피부'를 충분히 찍기 어려워 손수 렌즈를 깎았다. 렌즈가 공산품 사진기에 맞지 않아 직접 사진기를 조립했다. 카메라 삼각대도 직접 용접해 4m 길이로 늘였다. "탑을 올려다보며 찍으면 탑에 위압당해요. 탑과 눈높이를 맞춰야 탑의 멋을 온전히 느낄 수 있죠." 어른 키 배가 넘는 높이에 얹힌 카메라를 다루기 위해 사다리도 장만했다.

실제 탑을 찍는 일은 더 고됐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양 작가와 조수 4~5명이 500㎏에 가까운 무게의 장비들을 산속 절까지 옮겨야 했다. 3~4시간 동안 장막을 설치하다 해의 위치가 달라져 원하던 조광(照光)을 놓치는 일도 빈번했다. 일감을 덜 받고 석탑을 쫓아다니다 보니 수입도 반 가까이 줄었다. 그래도 그는 전보다 행복하다. "클라이언트 없이 제가 찍고 싶은 사진을 제가 원하는 방법대로 찍는다는 게 정말 좋아요."

양 작가의 석탑 사진 뒤에는 항상 검은 장막(帳幕)이 있다. "이제까지의 석탑 사진은 '주변의 자연, 배후의 사찰 등 배경과의 조화'를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자연광(自然光)을 받는 석탑 자체만도 충분히 완성된 예술품이라 생각합니다." 탑과 배경은 함께 찍히면 서로의 개성이 충돌해 오히려 매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이 그의 지론(持論)이다. "모델이 완벽하면 단색 배경에 조명 하나만 있어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탑이 그렇습니다. 겉치장 없는 단아함, 군더더기 없는 깨끗하고 완벽한 비례를 지닌 석탑은 단연 완벽한 피사체입니다."

겨울엔 찍어야 할 탑이 많다. "눈에 덮인 석탑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풍깁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석탑들을 찍을 겁니다. 이미 바퀴에 스노 체인도 감아 뒀어요." 양 작가는 내년까지 탑 사진을 충분히 찍은 후, 대중에게 그가 발견한 '탑의 매력'을 선보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