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이다. 미세먼지와 소주로 서울은 요란하다. 미세먼지는 공중전을, 뱃속에서는 소주와 맥주가 진격한다. 1차 소주전을 벌이고, 2차 대전을 자리를 옮겨 벌이다가, 끝에는 새벽 3시에 3차 대전을 끝내는 주당들도 있다. 어떤 점잖은 술을 즐기는 분은 테니스 모임에서 평균 소주 흡음량을 소주 다섯 병이라고 해서 필자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젊어서 먹는 술에는 청춘의 풋풋함이 담긴다. 장년의 술에는 인생의 애환이 담기기 시작한다. 시니어들의 술에는 고단한 삶을 이제는 넘어 덕을 베풀고 남은 애잔한 외로움이 내려앉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1차에서 3차까지 가서 외로움을 술에 담가 먹어 없애기도 한다.
변영로의 명정 40년은 한문 풍의 글에 해학이 가득하다. 변영로의 호기로운 품격과 그의 방자한 술품이나 술격이 하늘 아래 서울에서 벌어지는 해학이 재미나다. 그런 술꾼을 주변에서 본 적이 없다.
미세먼지가 중국에서 바로 서울로 날아드는 시절이다. 터진 공중에 거대 유리 벽을 심슨 만화처럼 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더욱 술로 몸을 씻기 위해 술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소주 다섯 병에 안주는 이미 풍성했던 복부는 더는 손가락으로 찍어 누를 수도 없게 만만 팽팽해진다.
복은 소주에서 오는 걸까? 먹으면 배만 잔뜩 부른 맥주는 목에 넘어가는 맥아의 맛은 있지만, 알코올 도수를 즐기는 풍주가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주종이다. 이 애주가들은 소주를 지상 최고의 알코올로 손꼽는다.
소주 속에 이들은 인생을 녹이고, 자신의 아픔만큼 무거운 가슴을 증류주의 맑은 물속에 풍덩 뛰어든다. 꿀꺽 하고 소주는 입속에 머물다 목구멍을 지난다. 들리지도 않는 탄성이 들린다. 카! 하는 말은 영어의 카가 아니고, 순 한국 음성어다.
나는 맥주를 좋아한다. 맥아의 풍부한 맛에 짠맛이 나는 단백질 안주를 즐긴다. 육포를 씹으며 마시는 맥주 맛은 아주 운치가 높다. 나의 뇌는 알코올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캔맥주를 육포와 씹을 때 나는 그 기분을 사랑하는 편이다. 육포 맛을 알기 전에도 그렇고 후에도 한결같이 볶은 땅콩은 구수한 맛을 낸다. 때로 술은 인간에게 소소로운 즐거움이다.
한국 사회는 활짝 열린 태양의 문명이 아닌 살짝 잠기거나 휘영청 달빛이 반쯤 열리거나 창호지로 비치는 달빛 문명이다. 그래서 그 문명의 영혼의 유대를 위해서는 술이 필요하기도 하다. 한 잔 두 잔 그들의 권하는 소리에 닫힌 영혼들이 문이나 창을 소리도 묻혀 열리기도 한다. 한국 사회의 회식 문화는 이런 측면에서 어느 정도는 긴장을 푸는 효력이 있기도 하다.
커피의 향내만큼 소주의 단내는 강렬하다. 커피의 풍미가 입안에 끝 맛을 단맛으로 감돌게 하는 것처럼 소주의 쓴맛은 몸만 괜찮다면 단맛으로 꿀떡 같다. 그리고 삼겹살의 기름진 고기를 먹어주면 애주가의 눈동자는 금세 초롱초롱한 어릴 적 아이의 모습이 화현 하기도 한다. 입은 당연히 빙그레가 되고 만다. 먹는 즐거움은 생존의 보장이기에 아주 즐거운 모습이 된다.
나는 술꾼은 아니다. 자주 달빛 문화의 소주 끽다에 참여를 두려워하기도 한다. 작은 흡주의 기쁨은 행복으로 여기나 연거푸 마시는 소주 흡음 전쟁터는 사양하는 능력이 어느덧 배양된 예비군이다.
달이 하늘 높은 곳에 뜬 만큼 비록 그달이 달태백의 술잔에 비친 것과 달리 우리의 애주가들의 맑은 술에는 담기지 않지만, 적어도 그들의 애잔한 맑은 영혼들이 서로 담겼기를 소망한다. 소망 속에 자신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움터 오르고 자신을 사랑하는 꽃이 피어나고 애주가들의 개인과 그 가족들의 인생에 작은 열매가 맺히기를 희망해 본다.
달빛은 노란 은행잎 같다. 애주가들의 눈동자에 달빛의 따뜻한 노란 색이 반짝였으면 좋겠다. 인생의 무게가 소주에 푹 담긴 저녁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