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새처럼 날아올라도

새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훌훌 털어버리고 낯선 도시에서 낯선 사람 틈새에서 지도 한 장 펴들고 두리번거리거나 어느 버스를 타야 할지 몰라 낯선 이들을 붙잡고 한 질문을 또 하고 또 하고 그러다가 빌딩 숲 사이로 혹은 산 넘어 사라지는 해를 발견하곤 노을이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다 다음 행선지로 가는 열차를 놓칠지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늘 꿈을 꾼다. 나 홀로 어디론가 떠나는 꿈. 아는 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곳. 낯선 땅 낯선 곳으로 떠나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온전히 나만을 위한 생각으로 낯선 바람을 따라 새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을 때가 있다. 그곳이 어디든지 좋다. 나를 알지 못하는 곳이라면 내가 모르는 곳이라면 그것으로 족하다.

부산으로 떠났다. 더듬거리는 독수리 타법으로 인터넷 서핑을 시작하여 어찌어찌하여 찾아 들어간 곳에서 KTX 표를 끊고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열차를 탔다. 내가 하루 이틀 없어진다고 해서 나를 찾아 울고 보챌 사람도 없는 이 나이에 무엇이 그리 발길을 못 떨어지게 했는지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나 자신에게 주문을 걸어 놓고 살았는데 그 주문을 푸는 순간이다.

바다는 눈부셨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렀으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갈매기 떼가 춤을 추었다. 잔잔한 해풍 속에 실려 온 짭짜름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청잣빛 바닷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이름 모를 물고기가 ‘오늘은 유유자적 사는 거야. 급할 게 뭐 있어. 마음 가는 곳에 머물다가 가면 되지.’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속살거린다. '그래 그러지 뭐.’ 여기까지 왔는데 머리는 잠시 내려놓고 마음을 따르기로 한다.

갈매기가 난다. 유람선을 타고 부산 앞바다를 둘러보는데 떠날 때부터 따라오던 갈매기 떼다. 아직 털이 새하얗고 다리가 연약한 것을 보니 새끼들인 모양이다. 그 연약한 다리를 쭉 뻗어 모아서 몸에 바짝 붙이고 이리저리 잘도 난다. 귀엽다. 사랑스럽다. 그러다 갑자기 내 손등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저기 검버섯들이 돋아나기 시작한 손등. 쏴아 슬픔이 밀려든다.

광복동 거리는 축제 중이다. 서울의 명동쯤이야 가볍게 누른다 싶게 사람과 사람이 어깨를 스치고 12월을 맞아 각양각색의 트리가 밤을 수놓는다.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린다. 달뜬다. 얼마만 인가? 이런 달뜸은 좋은 징조라는 듯 밤하늘에 초승달이 싱긋 웃는다. 상큼하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의 말을 건네고 싶다.

죽었던 몸속 세포가 모두 살아난다. 하늘을 날고 빌딩 사이를 자유롭게 이리저리 누비고 다닌다. 국제시장의 달콤한 호떡 냄새, 젊은 청춘들의 속삭임에 취해있다가. 구제시장의 유행 지난 옷들에서 공원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련한 불빛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얼굴들. 가족이다.

여행이란 그렇게 떠나 온 곳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수순이다. 낯선 곳에서 문득 내 자리가 그리워지는 것. 그것이 여행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한다. 평소엔 보이지 않던 내 그림자가, 수면 위에 펼쳐지는 수채화 풍경처럼 아름답게 펼쳐지는 시각. 일상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