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현(신일산업) 사장의 믿음이 나를 신바람 나게 했다

우리 집에는 선풍기가 6대 있다. 안방과 거실, 주방에도 있고 아이들 방에도 있다. 이 선풍기들은 모두 '신일' 제품이다. 40년 가까이 이 제품만 쓰고 있다. 회사 사무실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선풍기뿐 아니라 환풍기도 모두 신일 제품이다.

신일과의 오랜 인연은 회사를 처음 차렸던 1970년대로 거슬로 올라간다. 아버지는 건설업을 크게 하셨다. 경기도청 토목과 직원으로 근무하다 건설업에 뛰어들었고, 6·25 전쟁 직전에는 전국에서 10위권에 들 정도였다. 하지만 정치에 뛰어들면서 집안 형편이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 때 경기도 화성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아버지 낙선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집에서 돈 나갈 만한 물건에는 모조리 압류 딱지가 붙었다. 매일 밤 빚쟁이들이 쳐들어왔다. 그런 세월을 3년 넘게 겪었고, 결국 아버지는 파산했다.

중앙대 약학과에 다니던 나는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처음엔 한 학기 정도만 휴학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한 학기가 1년이 됐고, 2년이 됐다. 그렇게 학교와 멀어졌다.

쉬느니 용돈이라도 벌어보겠다며 공사 현장에 나갔다. 먼 친척 형님이 하는 회사였는데, 기술이 없어 주로 공사를 감독하는 일을 했다. 2~3년 공사판에 있다보니 돈이 굴러가는 게 보였다. 내가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친척 형님께 부탁을 했다. "공사를 제가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월급은 안 받을 것이고, 수입의 30%를 떼 드리겠습니다." 당시엔 정부의 면허가 있어야 건설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내 이름으로 공사를 딸 수는 없었다.

돈을 좀 모아서 1971년 드디어 내 회사를 차렸다. '동지'라는 회사를 인수해 '이화공영'으로 이름을 바꿨다. 건설업계 순위는 467개 중 밑에서 7등이었다. 꿈에 부풀어 시작했지만 사업은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자재는 물 새듯 사라지고, 공사장 십장이 급여를 떼먹고 달아나는 경우도 있었다. 빚은 1억7000만원까지 불어났다. 다섯 살도 안된 두 아들과 아내의 잠자는 얼굴을 보면 가슴이 답답했다.

그때 기적같이 내 인생에 등장한 분이 김덕현 신일산업 사장이었다. 당시 신일은 경북 구미에 공장을 새로 지었는데, 다른 사람이 하던 공사를 내가 대신 맡게 됐다. 현장에 가보니 부지를 파면 물기가 스며나왔다. 한때 계곡이었던 곳을 흙으로 메웠기 때문이었다. 당초 4m짜리 파일을 박기로 했지만 실제론 10m 파일을 박아도 감당이 안 될 지경이었다. 김 사장에게 "공장 터를 옮겨야 합니다. 공장을 짓는다 해도 여름엔 습하고 겨울엔 추워서 기능공들 능률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라고 건의했다. 내가 직접 뛰어다니며 새 부지를 알아봤다. 결국 파일을 박지 않아도 되는 탄탄한 부지로 옮졌다. 공사가 끝나자 김 사장은 쓰지도 않은 파일 값을 다 계산해주며 "원래 들어갈 돈이었으니 받으라"고 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김 사장은 태릉에 있던 공장을 반월로 확장 이전하면서 내게 결정적인 사업 기반을 마련해줬다. 반월공장은 부지가 4만평이나 됐다. 몇 년 동안 공사를 했는데, 그 물량을 전부 내게 줬다. 첫 입찰 때 우리 회사는 예정가보다 낮은 금액을 써냈다. 김 사장은 "공사를 하려면 제값을 받고 제대로 해야지, 터무니없이 싸게 해준다는 게 말이 되나. '자기 집 팔아 남의 집 지어준다'는 거짓말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며칠 후 태릉골프장에서 꼬리곰탕 한 그릇 하자며 나를 불러낸 그는 사무실로 돌아가더니 2억원짜리 어음을 쓱 내밀었다. 선급금이라고 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돈으로 빚을 다 갚을 수 있었고, 이후 사업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국산 선풍기를 처음 쓰게 된 것도 김 사장 덕분이었다. 우리 집엔 아주 오래된 '고물급'의 일제 선풍기가 있었다. 당시 신일 선풍기는 돈이 있어도 쉽게 살 수 없는 인기 절정의 가전제품이었다. 가전 대리점들도 원하는 물량의 일부만 받았고, 사람들은 웃돈을 주고 선풍기를 살 정도였다. 그 선풍기를 김 사장은 "필요하면 한 대 가져가"라고 했다. 그렇게 새 선풍기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

그는 왜 나를 그토록 믿었을까. 그리고 엄청난 금액을 선급금으로 줬을까. 김 사장은 평소 건설업자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싼값에 공사를 따내고 엉터리 공사를 하는 사기꾼 정도로 봤던 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 만난 내가 구미 공장 때처럼 정성을 다해 일하는 모습을 보고 믿음을 가졌던 것 같다.

1978년 반월공장이 완공되자, 신일이 일시적인 자금난을 겪었다. 김 사장이 하루는 내게 전화를 걸어 "은행돈을 써야 할 처지인데 3억원만 빌려줘"라고 부탁했다. 군말 없이 빌려줬더니 이후 1년 동안이나 은행 이자를 꼬박꼬박 보내왔다. 지금도 그 이자를 왜 받았는지 후회가 남는다.

지금까지 사업을 해오면서 어려운 일, 즐거운 일을 많이 겪었다. 그 동안 신일 선풍기는 늘 내곁에 있었다. 아직도 "내가 당신만큼만 젊었으면 할 일이 참 많을 텐데…"라고 말하는 김덕현 사장님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하다.

☞최삼규 사장은
외형보다 내실 경영… 건설협회장 맡아

1939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울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올해 시공능력평가 순위 148위인 이화공영을 43년째 이끌고 있다. 2011년 제25대 대한건설협회 회장(임기 3년)으로 뽑혔다.

눈에 보이는 외형보다는 내실있는 경영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업 초기 어려웠던 때를 빼고는 남의 돈, 은행 돈을 빌린 적이 없다고 한다. 대형 건설회사들이 중동에서 오일달러를 벌어들일 때에도 "내 능력을 넘는 일은 하지 않는다"며 곁눈질을 하지 않았다.

"공사는 제대로 하고, 값도 제대로 받아야 한다"는 경영 철학을 갖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건설협회장 취임 이후 '저가 수주→날림 공사→경영 악화'로 이어지는 건설업계 악순환을 끊기 위해 최저가 낙찰제 폐지 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