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어 병실서 7번 도망쳤던 남자, 아픈 아이들 돕는 '병원 산타'로 컴백

"아이고, 저 어린 애들 가슴에 나랑 똑같은 칼자국이 있네…."

지난 13일 오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어린이 병동에서 환경미화원 홍성석(54)씨는 천진하게 복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심장 수술을 받은 어린이들의 목 아래에는 붉은 수술 자국이 선명했다. "안녕! 하세요?" "감사합니다!" 병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검은 피부의 아이들은 양손 가득 선물 꾸러미를 들고 나타난 홍씨를 보고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인사했다. "이래서 몇 년째 제가 발길을 끊지 못해요. 어린 나이에도 씩씩하게 수술받는 아이들이 자꾸 눈에 밟혀요."

홍씨는 이 병원과 30여년 전부터 인연이 있다. 요리사 자격증을 따 가족을 부양하던 홍씨는 스무 살이던 1979년 입대 신체검사를 받다가 심장 판막 기형을 발견해 이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 "꼭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내리자, 홍씨는 늦은 밤 의사·간호사의 눈을 피해 팔에 꽂혀 있던 주삿바늘을 다 뽑고 '야반도주'했다. 수술받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수술비도 없는 데다 당장 그가 일하지 않으면 식구들이 먹고살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식당에 나가 다시 일을 하면서 통증이 밀려오면 약을 먹으며 버텼다. 그러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파 다시 입원했지만, 그때도 응급 상황만 넘기면 도망쳤다. 이렇게 20여년 동안 일곱 번이나 야반도주를 했고, 병원에서는 그를 '장발장 환자'라 불렀다.

1999년 큰 시련이 닥쳤다. 몸 상태가 나빠져 병원에 가다가 병원 앞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이다. 그는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다"며 "연세대 학생 세 명이 나를 병실로 옮겨다줬고, 이름도 안 밝히고 가버렸다고 하더라"고 했다. 그제야 홍씨는 어렵사리 돈을 모아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후유증으로 뇌병변장애 2급을 얻게 된 그는 오른쪽 손발을 잘 쓰지 못하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아내마저 떠나버려 홍씨에게 남은 건 여름이면 물이 새는 지하 단칸방과 어린 아들뿐이었다. 요리사 일도 할 수 없게 된 홍씨는 지하철에서 폐지를 주우며 아들을 키웠다.

2007년 홍씨 부자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구청이 임대아파트를 마련해주고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게 해줬다. 고정 수입이 생기자 홍씨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병원에서 일곱 번째 도망쳤을 때 담당 의사가 해준 말이었다. "'당신이 살 생각이 없으면 담배 피우고 술 마실 돈으로 어린 아이들이라도 도우라'고 하셨죠. 형편이 조금 나아지니 그 말부터 생각났어요."

한 푼 두 푼 돈을 모은 홍씨는 올해까지 7년 동안 어린이날·크리스마스 때마다 양말이나 모자, 장난감, 연필을 가슴 한가득 사 들고 병원을 찾고 있다. 2008년엔 돈가스를 튀겨 동네 아이들에게 나눠줘 '돈가스 아빠'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오는 21일엔 지하철 5호선 발산역 앞에서 어린이들에게 양말과 장갑을 나눠줄 예정이다.

지난 13일엔 아이티 아이들이 병원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기로 했다. "멀리서 온 아이들하고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고 싶어서요." 홍씨가 수줍게 웃었다.

"20년이나 병원 선생님들을 괴롭혔어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열심히 돈을 모아 병원에, 세상에 진 빚을 갚고 싶어요." 홍씨의 마음을 읽은 듯 아이티 어린이들이 홍씨의 옷자락을 꼭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