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가 하얀 눈으로 덮인 이 즈음 중원(中原) 땅으로 간다. 월악산국립공원을 중심으로 한 충북 충주 일대다. 적당한 산행과 적당한 역사와 적당한 스토리를 적당한 시간에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름하여 중원 문화여행.
미륵리사지는 유난히 푸르스름했다. 떨어지는 햇살도 파리했고 맵싸한 겨울바람도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천년을 흘러온 세월 동안 천 번 겨울이 오갔고, 사람들은 그 세월에 염원과 한을 흘려 보냈다. / 박종인 기자
◇마의태자와 하늘재
서기 935년이니 대략 1000년 전 딱 이맘때 신라 경순왕과 왕자는 이런 대화를 나눈다. "마땅히 죽을 각오로 지키다가 힘이 다한 뒤에야 그만둘지언정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준단 말입니까?" "죄 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참혹한 죽음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왕자는 '통곡하면서 왕에게 하직하고는 지름길로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바위를 의지하여 집으로 삼고 삼베옷을 입고 초식(草食)만 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왕자, 마의태자가 금강산까지 걸어간 지름길은 하늘재다. 문경 관음리에서 충주 미륵리로 이어지는 이 고갯길은 서기 156년 신라 아달라왕이 개척한 기록상 한반도 최초의 '계획 도로'다. 하늘재의 북쪽 끝은 충주 미륵리다. 마의태자에 얽힌 많은 사연이 시작되는 곳이다.
◇미륵리사지와 마의태자
우선 미륵리. 석불과 석탑 드문드문 서 있는 폐사지가 있다. 미륵리사지다. 하늘재를 넘은 마의태자가 세운 절이라고 했다.
맵싸한 겨울바람 속에 천년 세월을 견딘 석물(石物)들이 서 있다. 폐사지 한가운데에 10m가 넘는 미륵불이 서 있다. 경주 석굴암처럼 3면에 석벽이 서 있고 그 한복판에 미륵불이 우뚝하다. 그 규모에 일단 압도되고, 거친 돌로 쌓아 만든 낯선 풍경에 마음이 설렌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석불이 향한 방향은 남쪽도 동쪽도 아닌 북쪽이다. 국내에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부처님이다. 이 석불과 석등과 석탑을 잇는 일직선을 북쪽으로 연장하면 산 너머에 또 다른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직선거리 5㎞, 시간으로는 10분 거리다. 덕주사 마애불이다.
산 너머로 미륵리사지 석불을 바라보고 있는 덕주사 마애불.
◇북두칠성 아래 부처님
미륵리사지에서 나와 송계계곡을 따라 북상한다. 10분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덕주사 이정표가 나온다. 마의태자의 누나인 덕주 공주가 세웠다는 절이다. 옛 절은 6·25 때 불탔고 지금 절은 새로 지은 것이다. 옛 절은 지금 절에서 1.5㎞ 산길 위에 있었다. 절은 간 곳 없지만 거기에 거대한 불상이 하나 있어 미륵리사지 돌부처를 바라보고 있으니 덕주사 마애불이요, 사람들은 바로 덕주 공주 본인을 새긴 것이라고 한다. 두 불상은 서로를 바라보며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천년 동안 서 있다. '북두칠성 아래에 절을 지으라'는 계시에 한날한시에 두 사람이 동시에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겨울밤이면 덕주사 마애불 뒤로 솟는 북두칠성을 찍기 위해 야간 산행을 하는 사람이 많다.
덕주사 마애불은 산 중턱에 있다. 첫 이정표 이후 도무지 마애불 이정표가 보이지 않아 마음의 여유를 갖기 어렵다. 산길 1.5㎞는 못해도 30~40분을 잡아야 한다. 마음 산란해질 때쯤 석축 위로 바위가 보이고, 바위에서 부처님이 세상을 바라본다. 태자 남매의 현세 인연을 내세에서도 이어주고 있는 돌부처들 앞에 서면 그 기분, 단순한 관광이나 등산과는 조금 다르다. 짧은 산행 내내 흰눈 덕분에 눈은 호강하지만 오후 3시 정도면 어둑어둑해지니 서둘러야 한다.
◇세상을 경계하는 눈초리
절 주차장 약수로 목을 씻고 다시 계곡으로 나온다. 오른쪽은 충주호반 드라이브 코스, 왼쪽은 수안보온천 방향이다. 왼쪽으로 5분 거리에 있는 사자빈신사지 구층석탑(보물 94호)은 꼭 한 번 보도록 한다. 탑신 한가운데에는 부처 한 분이 사자 네 마리의 호위를 받으며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거란족 침입 이후 적을 물리치려는 염원을 담았다는 건립 목적 그대로 세상을 경계하는 부처님 눈초리가 매섭다. 나라를 잃은 왕자의 한(恨)과 나라를 잃지 않겠다는 서원이 중원 땅 한쪽에 중첩돼 있다. 여행은 이쯤에서 끝나고 온천욕을 즐기든 충주호로 가든 자유다. 어디든 하루 나들이로 가능한 짧고 진한 여행이다.
가는 길(서울 기준) 1.미륵리사지: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IC에서 괴산·수안보 방면→괴산교차로에서 충주·수안보 방향 좌회전→이후 외길 따라 가다가 오른쪽에 미륵리 이정표. 하늘재는 주차장에 차를 댄 뒤 미륵리사지로 들어가다가 왼쪽 길에 이정표. 2.사자빈신사지구층석탑: 미륵리에서 나와서 우회전, 5분 정도 송계계곡 쪽으로 가면 왼쪽 절골 마을 소로로 500m. 3.덕주사:구층석탑에서 나와서 좌회전해 5분 거리. 절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오른쪽 개울 건너 산행 40분. 중간에 이정표 없음. ※미륵리사지 내비게이션은 '수안보면 미륵리 58번지'.
숙박 충주 관광포털(www.cj100.net/tour)
맛집 수안보 향나무집식당(043-846-2813). 향나무정식 1만3000원. 청국장, 비지, 더덕무침, 굴비, 잡채 등 찬거리가 한상 가득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