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12월의 눈

눈이 내리고 있다. 어제 저녁부터 눈이 내린다는 예보야 있었지만 설마 앞이 안 보이게 이 정도까지 내릴 줄은 몰랐다. 처음엔 눈이 한 두어 개씩 흩날리기 시작하더니 어느 새 앞이 보이질 않는다. 서울에서 이렇게 폭설이 내리기는 흔치 않은 일이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에 섰다. 보던 업무야 잠시 미루어 두고 백의(白衣)의 무희(舞姬)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군무(群舞)를 눈 가는대로 쫒아 다녔다.

오늘 내리는 눈은 제법 품위가 느껴진다. 그러니 마음을 뒤흔들지 않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이렇게 내리는 눈이라면 퇴근 때의 악몽이야 잠시 접어두고 즐겨도 좋다.

그 즐거움 속에 고향 집이 있다. 눈이 내렸다 하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고향집이다. 두어 사람이 간신히 비켜서 지나갈만한 비좁은 어두운 골목길, 희미한 백열등 아래로 눈이 내리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던 골목길. 간간이 이 집, 저 집, 개들이 괜스레 짖는 걸 빼고는 사위는 더할 나위 없이 조용하다.

문득 들리는 노랫소리. 아버지의 노랫소리가 아득한 곳에서부터 들려온다. 아버지가 오시는 소리다. 언제 한 번 제대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아버지인데 술 한 잔 드시는 날이면 어김없이 골목 어귀에서부터 들리는 노랫소리다. 나는 아직도 이 노래를 모른다. 머리에서는 들리는데 입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가락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가 일제 시절 학교 다니실 때 부르던 노래인 모양인데, 그 노래가 일본 노래이기도 하려니와 집 대문 앞에만 서면 노래는 언제나 끝이 났다. 그러나 눈이 내리는 저녁이면, 어둠 속 저 쪽 어디선가 아버지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마당에 서서 옷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설국(雪國)'이라는 소설이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일본의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쓴 소설로 노벨 문학상을 탄 작품이었다. 사실 그 소설을 읽으면서 무슨 의미인지 갈래머리 여고생으로 좀 덜떨어진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소설임에도 참 열심히 읽었다. 배를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쭉 깔고 이불 속에서 읽던 소설이다. ‘국경(國境)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로 시작되는 그 소설을 읽으며 언젠가는 이 소설의 무대인 대설(大雪) 지역 ‘니가타현’에 한 번 가 봐야지 했다.

그 해 겨울엔 눈 雪자에 매료되어 살았다. 처음 알게 된 설야(雪夜)라는 단어도 좋았고 한참 유행하던 '하얀 겨울에 떠나요' 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겨울 매력에 빠져 살았다. 지금도 나는 왠지 겨울이라는 단어가 좋다. '겨울 남자'란 말도 좋고 '겨울 여자'란 말도 좋고 '겨울밤'도 얼마나 멋지고 낭만적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봄 여자나, 여름 여자 ... 다 너무 재미가 없다. ' 겨울 남자' '겨울 여자'라고 하면 어딘가 어감이 남다르고 고독하고 우수에 차고 뭔가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겨울이 좋다. 눈 내리는 날이 좋다. 고향 집으로 갈 수 있어 좋고, 따뜻한 아랫목이 생각나 좋고, 무엇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노랫소리가 들려서 좋다.